ADVERTISEMENT
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내가 살게, 계산은 네가 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

 은행원의 업무 능력이 새롭게 추가됐다. 불법 외환 거래를 ‘눈치껏’ 알아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지난달 27일 금융감독원이 국내 은행을 통한 4조원대 ‘코인 환치기’(불법 외환 거래) 의혹과 관련한 잠정 검사 결과를 발표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면 그렇다.

코인 관련 불법 외환 거래 차단 #대출 만기연장·이자상환 유예도 #은행에 책임 떠넘기는 금융당국

 검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6개월간 국내 암호화폐거래소에서 이체한 자금이 무역업체를 거쳐 무역거래 대금 송금으로 가장해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렇게 나간 자금 규모는 4조1000억원으로, 김치 프리미엄을 노린 불법 외환 거래로 추정된다.

 이준수 금감원 부원장은 “신설 업체로 매출이나 이런 게 불투명한 데 큰 규모의 송금 거래가 이뤄지면 일단 뭔가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냐”며 “해당 은행에서 내부 통제나 이런 걸 잘 강화해서 이뤄지지 않게끔 해야 하는데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름 ‘면책 조건’도 언급했다. “영업 창구에서 법에서 정하는 요건에 따라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서류를 보고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고 노력했다면 은행으로서 할 일을 다 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금감원의 책임에 대한 질문에는 “금감원이 수많은 외화 송금 거래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감독 당국인 금감원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이상 거래를 일선 창구 은행원이 촉과 눈치를 발휘해 막고, 은행들이 이렇게 골치 아픈 문제는 알아서 해결했어야 했다는 속내를 비친 모양새다.

 어쩌다 보니 은행이 금융권의 ‘홍반장’이 돼버렸다. 라이선스 산업이란 특성으로 인해 금융회사와 금융기관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은행의 책임과 의무는 만만치 않다. 각종 금융 정책과 규제와 관련해 일반 국민과 만나는 최일선에 있다 보니 관련 불만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 비난은 새삼스럽지 않다. 최근에는 ‘이자 장사’ 프레임에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금융부문 민생안정 과제 추진현황과 계획을 브리핑하고 있다. [뉴시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금융부문 민생안정 과제 추진현황과 계획을 브리핑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14일 발표한 ‘주거래 금융기관 책임관리제’로 ‘금융권 홍반장’인 은행의 책임은 하나 더 늘었다. 오는 9월 말 종료를 앞둔 소상공인 대출 만기연장과 이자상환 유예 조치와 관련해 대출 채권을 보유한 은행이 대상 차주(대출자)의 90~95%에 대해 자율적으로 만기연장 및 상환 유예를 하라는 것이다. 은행권에 따르면 기존에도 재연장하지 않는 차주가 5~10%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모든 대출에 적용하라는 ‘지도 지침’인 셈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금융 당국은 2020년 4월 소상공인 대출 만기연장과 이자상환 유예 조치를 했고, 그동안 네 차례 연장돼 오는 9월 종료를 앞두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해당 금융지원 조치 규모는 284조5000억원(대출 잔액 기준 133조9000억원)에 이른다. 올해 상반기를 거치며 해당 액수는 더 늘어났을 것이다. 부실 대출의 실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 올해 상반기 4대 금융지주가 쌓은 대손충당금만 2조원에 육박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추가 연장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금리 인상과 경기 둔화 우려 속 해당 조치의 중단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무늬만 종료’를 택한 이유다. 김 위원장은 “부채 문제는 채권자와 채무자 간 문제인데, 정부가 취약 계층과 일반 국민의 채무 부담을 줄이는 조치를 발표해 금융기관이 혜택을 본 측면이 있다”며 “금융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잠재적 부실 위험은 은행이 떠안으라는 말로 들린다.

 사적 계약 관계이고 당국의 추가 개입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이자 장사’ 프레임 속 사상 최대 실적 행진 중인 은행은 당국 입장에선 생색은 내고 책임은 떠넘길 수 있는 만만한 상대인 모양이다. 그야말로 ‘내가 살게, 계산은 네가 해’란 태세를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