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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만 5세 취학, 국민적 합의 필요한 사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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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에서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에서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대통령실]

공약·인수위에도 없던 정책 불쑥 꺼내

학교 책임자인 교육감과도 논의 없어

교육부가 지난달 29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밝힌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문제를 놓고 주말 내내 시끄러웠다. 교육부는 아동을 일찍 학교에 보내 사교육 격차를 줄이고, 사회 진출 연령을 앞당겨 국가 경제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순애 교육부 장관은 2025년 시행 로드맵까지 내놨다.

그러나 상당수 교육전문가들과 학부모들은 우려를 표한다. 한국교총은 “아동의 발달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13개 교육·학부모단체는 오늘 ‘만 5세 초등학교 조기입학 반대 기자회견’을 연다.

물론 입학 시기를 1년 앞당기자는 게 꼭 틀린 주장만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영국·호주·아일랜드·뉴질랜드 4개국은 만 5세에 취학한다. 하지만 미국·프랑스를 비롯한 26개국은 우리와 같이 만 6세 입학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2009년 이명박 정부의 미래기획위원회도 이 정책을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취학 연령을 정하는 것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1949년 교육법 제정 당시 정해 놓은 것을 처음 바꾸는 일이라면 충분한 여론 수렴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필수다. 이처럼 중차대한 일을 교육부는 정작 초·중등 교육의 책임자인 교육감들과 논의하지 않았다. 어린이와 학부모는 물론 교사, 유치원, 어린이집 등 수많은 이해당사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여당인 국민의힘과 이 사안을 진지하게 논의했는지도 의문이다. 정부의 졸속 정책 입안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대통령 공약이나 인수위원회 안건으로 포함돼 공론화된 적도 없다. 과거 정권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정책을 교육부 장관이 뜬금없이 첫 업무보고에서 밝히고, 대통령은 또 “신속히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깜짝 쇼’ 하듯 정책을 불쑥 내놓는 행태는 윤석열 정부의 교육철학이 얼마나 빈약한지 보여준다. 교육부가 내세운 만 5세 취학의 근거가 교육격차 해소라면 오히려 지난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제안한 ‘K-학년제’ 도입이 더욱 적합해 보인다.

아울러 20년 넘게 공전 중인 유보(유아교육·보육) 통합 문제의 선결도 필요하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돌봄 공백과 사교육 격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촘촘하게 정책을 입안해야 하는데, 불쑥 로드맵부터 꺼내 놓으니 제대로 될 일도 되지 않는다.

정책 마련 과정에서 소통은 의무다. 다수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백년대계까지는 아니어도 사전에 충분히 교감한 상태에서 이 문제를 꺼냈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장관이 대통령에게 불쑥 제안하지 말고 향후 출범할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자연스럽게 공론화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