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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경기침체냐 아니냐 논쟁에…자물쇠 걸린 위키피디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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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계인이 이용하는 참여형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서 ‘경기 침체(Recession)’ 편집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의 2분기 경제성장률이 1분기에 이어 뒷걸음질치자 이를 경기 침체로 볼지,  말지를 놓고서다.

발단은 일부 사용자들이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2개 분기 연속으로 국내총생산(GDP)이 감소하면 경기 침체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려는 시도였다. 해당 내용을 덧붙이자 기존 편집자들이 “근거나 인용이 부족하다”며 이를 삭제했다. 미국 정부가 “공식적인 경기 침체 여부는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판단한다”며 GDP에 근거한 경기 침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치열한 공방은 계속 이어지다가 어정쩡한 휴전으로 봉합됐다. ‘경기 침체의 정의는 국가와 학자마다 다양하지만, GDP 2개 분기 연속 감소는 경기 침체의 현실적인 정의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설명이 추가된 것이다.

또 ‘경기 침체’ 항목에는 오는 3일까지 자물쇠가 걸렸다. 신규 이용자의 편집을 막은 것이다. 원래대로면 누구든 ‘편집’ 버튼을 사용해 적절한 근거와 인용을 통해 해당 항목에 대한 정의나 설명을 덧붙일 수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은 “경기 침체 논쟁이 너무 뜨겁다 보니 사람들이 (위키의) 정의를 계속 바꾸려고 했고, 결국 편집 중단으로 이어졌다”고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경기침체’ 공식 판정까지 최소 수개월

경기 침체 논쟁의 시작은 지난달 28일 발표된 미국의 2분기 경제성장률(-0.9%·전분기 대비 연율)이다. 1분기(1.6%)에 이어 2개 분기 연속 뒷걸음질했다. 미국의 경우 공식 경기 침체 여부는 NBER 소속 경제학자 8명으로 구성된 ‘경기순환결정위원회’가 판단한다. GDP와 고용·가계소득·소비지출·산업생산 등 8개의 경제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

경기순환결정위원장인 밥 홀 스탠퍼드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어느 한 지표를 다른 지표보다 우위에 두고 검토하는 경우는 없다”며 “GDP 수치만으로 침체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혼란을 부추기는 건 경기 침체 판단의 기초가 되는 개별 경제지표가 엇갈린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경기 침체를 주장하는 측은 2개 분기 연속 감소한 GDP 증가율에 무게를 둔다. 타라 싱클레어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경제가 2개 분기 연속 역성장하고도 침체에 빠지지 않은 기록상 유일한 시기는 1947년뿐”이라고 말했다.

2분기에 악화한 소비지표도 경기 침체 우려를 부추긴다. 2분기 개인소비는 1.0% 늘어나는 데 그치며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장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으로 서비스(4.1%) 부문은 늘었지만, 고물가로 내구재(-2.6%)와 비내구재(-5.5%) 소비가 줄어든 탓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조너선 밀러 바클레이즈 연구원은 “소비 측면에서 광범위한 감소”라고 평가했다.

이런 우려에도 미국 정부는 경기 침체를 부인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분기 GDP 발표 직후 미국이 경기 침체가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면서 고용지표와 함께 소비지출 증가를 언급했다.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발표한 지난 6월 개인소비지출은 전달보다 1.1% 증가했다.

침체를 부정하는 더 중요한 근거는 고용 상황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2분기 GDP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한 달에 약 40만 개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은 경기 침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 6월 비농업 부문 고용은 37만2000명 증가했다. 4월(36만8000개)과 5월(38만4000개)에 이어 탄탄한 고용 상황이 유지된 것이다. 실업률도 지난 3월부터 완전 고용에 가까운 3.6%를 유지하고 있다.

경기 침체 논쟁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일단 NBER이 이른 시일 내에 경기 침체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WSJ 분석에 따르면 적게는 경기 침체에 접어든 지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 뒤에 NBER이 경기 침체를 공식 발표됐다. 예컨대 코로나19 직후인 2020년 2월이 침체 시작이었고, NBER이 경기 침체를 공식 발표한 건 2020년 6월이었다. 그 직전 침체는 2007년 12월이었는데 공식 발표는 1년 뒤인 2008년 12월에나 이뤄졌다.

중간선거 앞두고 정치적 이슈로 확산

경기 침체 논쟁은 미국의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이슈로까지 번지는 모양새다. 유례없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으로 안 그래도 인기가 없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경기 침체는 결정타가 될 수 있다.  30일(현지시간) 더힐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5~26일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8%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공화당은 “바이든 정부가 침체를 피하기 위해 경기 침체를 재정의하려고 한다”(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며 맹렬히 비난 중이다. 뉴욕타임스는 “침체인지, 아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순간 그 정권은 패배자라는 정치 격언이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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