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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 정의 일시 중단"...위키피디아로 번진 갑론을박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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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위키피디아는 경기 침체 전쟁 중이다. 미국의 2분기 경제성장률이 1분기에 이어 뒷걸음질 치자, 경기 침체의 정의를 둘러싼 ‘편집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발단은 일부 사용자들이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2개 분기 연속으로 국내총생산(GDP)이 감소하면 경기 침체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려는 시도였다. 해당 내용을 덧붙이자 기존 편집자들이 "근거나 인용이 부족하다"며 이를 삭제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미국 정부가 “공식적인 경기 침체 여부는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판단한다"며 GDP에 근거한 경기 침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경기 침체의 정의'를 차지하려는 고지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뜨겁게 이어졌다.

치열한 공방 속 편집 전쟁은 어정쩡한 휴전을 택했다. '경기 침체의 정의는 국가와 학자마다 다양하지만 GDP 2개 분기 연속 감소는 경기 침체의 현실적인 정의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설명이 추가된 것이다. 하지만 논란의 중심에 선 위키피디아의 ‘침체(Recession)’ 항목에는 오는 3일까지 자물쇠가 걸렸다. 신규 이용자의 편집을 막은 것이다.

전 세계인이 애용하는 사용자 참여형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의 경우 원래대로면 누구든 ‘편집’ 버튼을 사용해 적절한 근거와 인용을 통해 해당 항목에 대한 정의나 설명을 덧붙일 수 있다. 하지만 경기 침체라는 '뜨거운 감자'가 위키피디아를 폐쇄형 백과사전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침체 공식 정의 없어, 8명의 경제학자가 판단

위키피디아 '침체'항목의 토론 페이지. 그동안 일어난 침체 정의 논란부터 삭제 논란까지 이용자들이 뜨겁게 토론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침체'항목의 토론 페이지. 그동안 일어난 침체 정의 논란부터 삭제 논란까지 이용자들이 뜨겁게 토론하고 있다.

위키피디아를 둘러싼 편집 전쟁은 ‘미국의 경기 침체’에 대한 엇갈린 시선을 여실히 드러낸다. 경기 침체 논란에 제대로 불을 붙인 건 지난달 28일 발표된 미국의 2분기 경제성장률(-0.9%·전분기 대비 연율)이다. 1분기(1.6%)에 이어 2개 분기 연속 성장률이 뒷걸음질하자 경기 침체 가능성이 제기됐고, 미국 정부가 이를 강하게 부정하면서 논쟁은 뜨거워졌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은 “경기 침체 논쟁이 너무 뜨겁다 보니, 사람들이 (위키의) 정의를 계속 바꾸려고 했고, 결국 편집 중단으로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경기 침체 논쟁이 과열되고 있지만, 문제는 이를 정의할 구체적 기준이 없다는 데 있다. 2개 분기 연속 역성장을 경기 침체로 판단한다는 일반론에도, 미국의 경우 경기 침체 여부는 NBER 소속 경제학자 8명으로 구성된 '경기순환결정위원회'가 판단한다. GDP와 고용·가계소득·소비지출·산업생산 등 8개의 경제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

경기순환결정위원장인 밥 홀 스탠포드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어느 한 지표를 다른 지표보다 우위에 두고 검토하는 경우는 없다"며 "GDP 수치만으로 침체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침체 인정 측 "GDP 역성장 1번 제외하고 모두 침체로" 

논란과 혼란을 부추기는 건 경기 침체 판단의 기초가 되는 개별 경제지표가 엇갈린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경기 침체를 주장하는 측은 2개 분기 연속 감소한 GDP 증가율에 무게를 둔다. 역사적으로 GDP가 2개 분기 이상 역성장한 경우, 1947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기 침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타라 싱클레어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경제가 2개 분기 연속 역성장하고도 침체에 빠지지 않은 기록상 유일한 시기는 1947년뿐"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2분기에 악화한 소비 지표도 경기 침체 우려를 부추긴다. 미국 경제에서 75%를 차지하는 소비는 경제 상황을 판단할 때 주요한 척도다. 2분기 개인소비는 1.0% 늘어나는 데 그치며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리오프닝으로 서비스(4.1%) 부문은 늘었지만 고물가로 내구재(-2.6%)와 비내구재(-5.5%) 소비가 줄어든 탓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조나단 밀러 투자은행 바클레이즈의 연구원은 “소비 측면에서 광범위한 감소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침체 부정 측 "견고한 소비, 뜨거운 고용시장" 

이러한 우려에도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경기 침체를 부인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분기 GDP 발표 직후 미국이 경기 침체가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면서 고용 지표와 함께 소비지출 증가를 언급했다.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발표한 지난 6월 개인소비지출은 전달보다 1.1% 증가했다.

쓰는 돈의 액수는 늘었지만 ‘소비의 질’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네일손더스 글로벌데이터 리테일 최고경영자(CEO)는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물가가 뛰면서 미국인들이 같은 양의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침체에 손사래를 치는 측의 근거는 고용 상황이다. "실업 없는 침체는 없었다"는 것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2분기 GDP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한 달에 약 40만 개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은 경기 침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 6월 비농업 부문 고용은 37만2000명 증가했다. 4월(36만8000개)과 5월(38만4000개)에 이어 에 이어 탄탄한 고용 상황이 유지된 것이다. 실업률도 지난 3월부터 완전 고용에 가까운 3.6%를 유지하고 있다.

중간선거 앞두고, 정치적 논쟁으로 불붙어 

경기 침체 논쟁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일단 NBER가 이른 시일 내에 경기 침체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WSJ은 그동안 실제 경기 침체에 들어선 시기와 공표 시기의 시차를 자체 분석했다. 그 결과 적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 뒤에 경기침체가 공식 발표됐다.

예컨대 바로 직전인 코로나19 직후 경기 침체의 경우 2020년 2월이 침체 시작이었고, 경기 침체를 공식 발표한 건 2020년 6월이었다. 그 직전 침체는 2007년 12월이었는데 공식 발표는 1년 뒤인 2008년 12월에나 이뤄졌다.

게다가 미국의 중간 선거를 앞두고 경기 침체 논쟁은 정치적 이슈로 번지는 모양새다. 유례없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으로 인해 인기가 없는 바이든 정부가 경기 침체까지 인정하는 건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더힐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5일~26일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8%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공화당은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필두로 “바이든 정부가 침체를 피하기 위해 경기 침체를 제정의 하려고 한다”며 맹렬히 비난 중이다. ‘바이든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도 언론에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침체인지 아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순간 그 정권은 패배자라는 정치 격언이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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