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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사라졌다...전통일까 혁신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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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비영리사단법인 '고잉홈 프로젝트'의 창단 첫 음악제 '더 고잉홈위크'의 막이 올랐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지난 3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비영리사단법인 '고잉홈 프로젝트'의 창단 첫 음악제 '더 고잉홈위크'의 막이 올랐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7월 30일 밤 롯데콘서트홀. 80여 명의 단원으로 가득 찬 무대는 여느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다름없어 보였다. 자세히 보면 조금 달랐다. 서울시향, 라디오프랑스필, 스위스로망드 오케스트라 악장을 역임한 스베틀린 루세브를 비롯해 바이올린·비올라·첼로 등 현악 주자들이 더 촘촘하게 앉아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목관·타악 주자들이 방사형으로 도열했다. 무대의 주인공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인 고잉홈프로젝트. 평창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인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기획한 평창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모체가 돼 작년 말 비영리사단법인으로 창단했다.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엿새 동안 펼쳐지는 이들 최초 연속 공연의 첫날이었다. 14개국 50개 오케스트라의 국내외 연주자가 주축이 된 올스타 오케스트라가 베일을 벗었다.

평창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모체 작년 출범 고잉홈프로젝트 #80여명 단원이 지휘자 없는 ‘봄의 제전’ 야성적, 원초적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이상적 앙상블 꿈꾸며 시작 #4일까지 롯데콘서트홀에서 ‘더고잉홈위크’

평소 같으면 등장할 지휘자를 기다리는 시간에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이 곧바로 시작됐다. 미묘한 바순의 음색이 신호인 듯 목관악기들이 하나둘 움트듯 깨어나 현과 타악으로 격렬하게 번져가는 이 곡은 이제는 완연한 고전음악이지만 1913년 샹젤리제 극장에서 피에르 몽퇴 지휘로 초연될 때는 달랐다. 파리의 청중은 강렬한 리듬과 불협화음에 충격받았다.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며 고함을 지르는 소동이 벌어졌었다.

14개국 50개 오케스트라의 국내외 연주자가 주축이 된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고잉홈프로젝트'는 지난 30일 열린 첫번째 공연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지휘자 없이 선보였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14개국 50개 오케스트라의 국내외 연주자가 주축이 된 프로젝트 오케스트라 '고잉홈프로젝트'는 지난 30일 열린 첫번째 공연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지휘자 없이 선보였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초연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지휘자 없는 봄의 제전’은 적잖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야성적이고 원초적인 작품의 성격은 더욱 부각됐다. 지휘자에게 쏠리던 시선이 각 단원에게 향하면서 한 명 한 명의 동작이 더욱 명료하고 크게 들어왔다. 만에 하나 우려했던 통제 불능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수의 긴장이 서로를 제어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오르페우스 체임버처럼 유명한 악단 외에도 해외에는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귀하지 않은 편이다. 고잉홈프로젝트의 첫 공연은 전통과 혁신에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처음엔 늘 함께한 지휘자를 없앤 혁신으로 보이지만 작곡가 베르디 당대만 해도 지휘자 없이 오페라를 연주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하니 고잉홈프로젝트의 첫 연주는 ‘전통적인 연주’의 재현으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플루트 수석으로 참여한 조성현(연세대 교수, 전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 수석)은 “오케스트라에서 단원 본인의 ‘귀’보다 지휘자를 바라보는 ‘눈’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비 음악적인 과정인 셈이다. 이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모두가 완벽하게 귀 기울이는 앙상블로 교향악을 만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연주자의 이상을 묻는 질문에서 이번 공연이 탄생했다.

“단원 대부분은 파트보가 아니라 지휘자 스코어(총보)를 보고 공부했어요. 작품에 대한 연구의 깊이가 최대치였습니다. 서로 귀를 열었더니 처음 들어보는 화성이나 색채감을 발견하곤 했죠.”(조성현)

이날 ‘봄의 제전’에 앞선 1부에는 20여 명의 현악 단원이 등장해 홀스트의 ‘세인트 폴 모음곡’을 연주했다. 발로는 스텝을 손으로는 스냅을 주며 민요풍 춤곡에서 완급을 조절했다. 2악장은 화사하고 서정적이었고 3악장은 피치카토와 애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자발적인 연주가 착착 들어맞았다. 마지막 흥겨운 민요풍 악장이 끝나자 객석에선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갈채가 쏟아졌다.

'고잉홈프로젝트' 창단을 주도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30일 개막공연에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고잉홈프로젝트' 창단을 주도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30일 개막공연에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30일 '고잉홈프로젝트' 개막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한 알렉상드르 바티(트럼펫)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30일 '고잉홈프로젝트' 개막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한 알렉상드르 바티(트럼펫)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 고잉홈프로젝트]

손열음(피아노)과 알렉상드르 바티(트럼펫)가 협연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이날 연주회의 백미였다. 빨간 옷을 입고 등장한 손열음은 바티와 루세브를 뒤돌아보고 연주를 시작했다. 분방하면서도 스타카토가 살아있는 피아노였다. 검객처럼 정확하게 찌르는 바티의 트럼펫 위로 손열음의 건반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무겁고 암울한 2악장과 피아노의 독백이 무거운 3악장을 지나 냉소적이면서 서커스 같은 마지막 악장이 인상적이었다.

더고잉홈위크는 4일까지 롯데콘서트홀에서 계속된다. 1일은 ‘그랑 파르티타’가 주제다. 쇤베르크 ‘정화된 밤’과 함경(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오보에 수석), 조인혁(메트 오케스트라 클라리넷 수석), 유성권(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바순 수석), 김홍박(오슬로 필 호른 수석), 유해리(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 호른 수석) 등 스타 관악 주자들이 총출동하는 모차르트 ‘그랑 파르티타’가 선보인다. 2일 ‘볼레로 : 더 갈라’는 무려 14명의 협연자가 차례로 등장해 협주곡을 들려주는 마라톤 콘서트다. 라벨 ‘볼레로’로 끝을 맺는다. 3일 ‘집으로’는 시반 마겐(핀란드 방송교향악단 하프 주자)의 연주로 시작해 김두민(전 뒤셀도르프 심포니 첼로 수석, 서울대 교수)과 손열음의 드보르자크 ‘숲의 고요’, 스베틀린 루세브, 플로린 일리에스쿠(프랑크푸르트방송교향악단 악장), 헝웨이 황(밴쿠버 심포니 비올라 수석), 김두민(첼로), 손열음의 드보르자크 피아노 5중주 Op.81로 이어진다. 4일 폐막 공연은 후안호 메나가 지휘봉을 잡는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방불케 하는 브루크너의 중량급 걸작 교향곡 6번을 연주한다. 김홍박이 협연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호른 협주곡 1번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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