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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 갈림길에 선 韓기업...'칩4 동맹' 리스크 선명해진다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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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올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미국 산업의 가장 아픈 손가락은 칩(Chip)이다. 작은 조각을 뜻하는 칩은 반도체를 상징한다. 애당초 반도체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산업이었다. 전자공학의 시작을 알린 진공관은 에디슨의 조명회사에서 일하던 영국 전기공학자 존 앰브로즈 플레밍이 1904년 발명했다. 이를 발전시킨 것도 미국이다. 미 벨연구소에서 일하던 윌리엄 쇼클리와 존 바딘, 월터 브래튼은 1948년 진공관을 대체하는 트랜지스터를 고안했다. 현대식 반도체의 시작이다. 이후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의 엔지니어 잭 킬비와 페어차일드의 로버트 노이스는 1958년 각각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를 발명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세 명과 잭 킬비는 반도체 개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노벨상을 받았다. 따져보면 반도체는 순도 100% 미제인 것이다.

미국은 앞선 원천기술을 무기로 초기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미국의 반도체 천하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기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기술 개발에 나선 일본은 1983년에는 64K 메모리 반도체 세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일본 특파원을 지낸 티 알 레이드는 『더 칩』에서 “일본 반도체의 높은 품질과 정부 지원금을 미국 기업이 넘어서지 못했다”고 봤다. 이후 일본 반도체 기업의 몰락과 한국·대만 기업의 반도체 시장 약진은 익히 알려진 것과 같다. 미국에서 시작해 일본을 거쳐 한국과 대만으로 반도체 산업이 서진(西進)한 것이다.

중국 베이징시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2017년 롯데마트 주셴차오점과 양차오점에 대한 발전기와 변압기의 에너지 사용 과도를 문제 삼아 설비를 몰수했다. [연합뉴스]

중국 베이징시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2017년 롯데마트 주셴차오점과 양차오점에 대한 발전기와 변압기의 에너지 사용 과도를 문제 삼아 설비를 몰수했다. [연합뉴스]

그 무렵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이란 단어가 생겨났다. 네 마리의 용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위기를 느낀 중국 정부는 1980년대 초부터 정부의 가격통제를 줄이며 시장 개방을 확대했다. 당시 10억 인구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시장이 열린 것이다. 그에 맞춰 국내 기업도 중국 투자에 열을 올렸다. 서진(西進)이 국내 기업의 투자 키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중국 투자는 산업군을 가리지 않았다. 전자와 자동차·유통 등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 모두 중국에 진출했다.

이런 흐름이 깨지기 시작한 건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사태부터다. 한반도 내 사드 배치에 반대한 중국은 노골적인 경제 보복에 나섰다.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중국 베이징시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롯데마트에서 발전기를 몰수한 한장의 사진은 한국 기업의 지워지지 않는 중국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후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은 중국 시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롯데그룹은 올해 초 중국 내 헤드쿼터를 청산했다.) 탈 중국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9년 중국 내 스마트폰 생산기지 가동을 중단했고, 현대자동차는 베이징 공장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정치권력은 이런 흐름에 불을 붙이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26일 대(對)중국 무역정책과 관련해 “과거처럼 중국이 대한민국의 무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상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중국 시장이 작동하지 않을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지난달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투자 늘었지만 중국 투자 줄어 

20년 넘게 중국 시장에 공을 들이던 한국 기업은 최근 들어 미국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서진에서 동진(東進)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2020년 이후 확연해지고 있다. 국내 기업의 미국을 향한 동진(東進) 투자는 통계가 증명한다. 기획재정부가 집계하는 해외직접투자 중 미국 직접투자 비율은 2018년부터 상승세다. 해외직접투자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8년 21.9%를 기록한 후 23.8%(2019년), 25.5%(2020년 1~3분기)로 매년 올랐다. 하지만 해외직접투자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8년과 2019년 각각 9.3%를 기록했지만 2020년(1~3분기)에는 7.7%로 떨어졌다. 2015년 9.8%로 정점을 찍은 뒤 중국 점유율은 계속 하락세다.

해외직접투자액.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해외직접투자액.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실제로 국내 기업의 미국 투자 확대는 올해 상반기 내내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올 초 250조원을 투자해 미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 11개를 짓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화상회의에서 29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6조3000억원을 투자해 미국에 전기차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LG도 전기차 배터리 북미 공장에 수조 원을 투자하고 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방향을 틀었지만, 중국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다. 지난해 기준 대 중국 수출액은 전체 수출총액의 25.3%에 이른다. 여기에 국내 기업의 고민이 있다. 자금력이 풍부한 기업은 급변침을 견딜 여력이 충분하지만, 중소기업은 상황이 다르다. 수출입은행(EXIM) 해외경제연구소가 올 2월 공개한 수출기업 해외 공급망 현황 및 영향 조사에 따르면 수출기업의 해외 공급망 중 중국 의존도는 46%에 달한다. 중국이 국내 수출 기업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올 5월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 조만간 양산에 돌입하는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반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에 사인했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올 5월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 조만간 양산에 돌입하는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반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에 사인했다. [연합뉴스]

‘칩4’ 참여 압박…양자택일 딜레마 

이런 가운데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반도체 공급망 동맹 ‘칩4’ 참여를 압박하는 중이다. 여기엔 미국 산업의 가장 아픈 손가락을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겼다. 칩4에 참여하면 국내 기업의 동진 전략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중국 시장에선 멀어질 수밖에 없다. 양자택일 상황이다.

딜레마를 마주한 기업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27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국전쟁 기념공원 추모의 벽 제막식에 참석해 ‘칩4가 중국 사업 비중이 높은 SK에게 부담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약간 조심스럽기는 한 얘기”라며 “정부에서 잘 다룰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에는 동진과 서진 사이에 놓인 한국 기업의 딜레마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와 동시에 정부의 결정을 기업이 거스르기 부담스럽다는 뉘앙스도 섞여 있다. 최 회장은 “이것은 제가 하는 게 아니라 정부나 다른 곳에서 이 문제들을 잘 다루리라고 생각한다”며 “거기서도 같이 논의돼서 저희한테 가장 유리한 쪽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의 언급처럼 미국과 중국 그사이에 놓인 한국 기업의 외교 리스크는 올해 하반기 더욱 선명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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