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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공공기록물 무단 파기, 국민 알 권리 침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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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9호 30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오른쪽)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2015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건물을 나서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최근 유죄가 확정됐다. 연합뉴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오른쪽)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2015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건물을 나서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최근 유죄가 확정됐다. 연합뉴스

법원, NLL 대통령기록물 삭제 유죄 확정

권력 감시 위해 무단 폐기 엄벌 시사

대통령기록물 관리 규정 보완 서둘러야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공방에서 시작된 ‘사초(史草) 실종’ 사건이 10년 만에 마무리됐다. 대법원 2부는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비서관(문재인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에 대해 대통령기록물법 위반과 공용전자기록 등의 손상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공방은 2012년 새누리당 측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해 불거졌다. 검찰이 회의록 초본을 삭제했다며 기소했는데, 대통령기록물 해당 여부가 쟁점이었다. 1, 2심은 최종 결재가 이뤄지지 않아 무죄라고 봤지만, 대법원은 회의록을 열람했을 때 사실상 결재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공공기록물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했다는 의의가 있다. 최종 공문서의 재료로 쓰인 문서라도 실질적인 결재가 이뤄지고 가치가 있다면 삭제해선 안 된다는 사법적 판단이다. 공공기록물을 파기해 물의를 빚은 경우가 많았지만 수사기관은 공식 결재나 시스템 등록 등이 있어야 한다며 범위를 좁게 해석해왔다. 공공기록물 관리법에 7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 벌금 조항이 있음에도 대부분 경징계나 주의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임의 폐기 행위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마련됐다.

공공기록물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권력 감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공적 업무와 관련한 문서가 파기되면 정책이나 의사 결정의 투명성을 담보할 수 없다. 문서를 없애는 행위는 대부분 잘못을 감추기 위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엄격히 제한하는 게 책임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공공기록물 보존은 사후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권력을 잡은 상태에서는 의혹이 제기되더라도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정권이 끝난 후 잘못이 드러나거나 검증을 벌여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수사기관 등이 객관적 증거로 사실관계를 확인토록 하고, 누가 관여했으며 결정 과정은 어땠는지 등을 밝혀낼 열쇠가 공공기록물이다.

이번 판결은 다른 사건 처리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국정원은 박지원 전 원장이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관련 내부 생산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정황이 있다며 검찰에 고발했다. 삭제 지시가 사실인지, 보고서가 삭제해선 안 될 기록인지가 변수다. 박 전 원장은 “국정원 서버에서 지워도 첩보 생산처(국방부) 서버의 원본은 남는다”고 반박했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이 삭제한 회의록 초본은 국정원이 작성한 회의록을 수정한 것으로, 원본이 국정원에 남아 있었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서훈 전 국정원장은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과 관련해 정부합동조사를 조기 종료시킨 혐의로 고발됐다. 합동조사 상황을 담은 보고서의 ‘귀순’ 등의 표현을 빼고 ‘대공 혐의점 없음’ 표현을 추가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월성 원전 1호기 문건 삭제’ 의혹 재판에서도 전자파일 삭제의 위법성이 쟁점이다. 이재명 의원의 성남시장 재임 시 지시 사항이 담긴 원본 자료 폐기 논란도 일고 있다. 신상진 성남시장 측은 ‘개별지시사항 수기 결재문서 원본 폐기’ 의혹에 대해 수사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공공기록물의 무단 파기는 국민 알 권리에 대한 침해다. 더욱이 정책 잘못이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면 국기 문란 행위인 만큼 엄벌해야 한다. 차제에 대통령기록물 관리 규정과 비공개 요건도 보다 엄밀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가기록원의 감사 권한을 확대하는 등 제도적 보완도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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