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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남쪽 시골 선술집, 마키아벨리 ‘정신적 환풍구’ 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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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9호 27면

와글와글

‘나쁜 호텔’이라 불렸던 마키아벨리의 집. [사진 손관승]

‘나쁜 호텔’이라 불렸던 마키아벨리의 집. [사진 손관승]

한 병의 와인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9년 전 직장문을 나섰을 때 주변에서는 자유인이 되었다고 축하해주었지만, 내 마음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비교적 이른 나이의 퇴직이었던 데다 아직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라던 나짐 히크메트의 시가 곧 내 마음이었다. 막막한 심정에 괴테의 여행기 한 권을 들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하다가 운명의 와인을 만났다.

메디치 가문 축출 음모 가담 혐의

마키아벨리의 책상으로, 군주론을 집필했던 공간이다. [사진 손관승]

마키아벨리의 책상으로, 군주론을 집필했던 공간이다. [사진 손관승]

그 해는 마침 『군주론』 출간 500주년이어서 나는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피렌체 남쪽 산카시아노의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라는 시골에 그의 집이 있었다. 피렌체 시내에서 출발하면 자동차로 불과 30분 거리로 시내를 벗어나자 토스카나 특유의 전원 풍경이 펼쳐졌다. 능선을 따라 사이프러스가 서 있고, 올리브와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탈리아 대표 와인인 키안티 지역을 따라가는 ‘키안티 길’(Strada Chianti) 부근이었다. 피렌체에서 시작해 남쪽 시에나까지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약 80㎞의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키안티쟈나’(Chiantigiana)라 부르기도 하는데 정식 도로명은 SR222번 지방도로다. 농장과 투어리즘을 결합한 숙소 ‘아그리투어리스모’가 있어 와인을 좋아하고 인문학에 관심 많은 여행자라면 꿈과 같은 여행길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런 낭만적인 이유로 이곳에 이사온 것은 아니었다. 14년간 피렌체 공화국에서 외교, 정무 등 핵심업무를 맡고 있던 마키아벨리에게 불운이 닥친 것은 1512년 여름이었다. 추방되었던 메디치 가문이 스페인을 등에 업고 다시 집권하면서 공화정은 붕괴되고 핵심 자리에 있던 마키아벨리는 쫓겨나게 된다. 그의 나이 불과 43살 때의 일이었다. 다음 해인 1513년 2월 메디치 축출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투옥된 뒤 고문까지 당하다가 최초의 메디치 출신 교황인 레오 10세 즉위 기념 사면으로 풀려났다.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가 그린 마키아벨리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가 그린 마키아벨리 초상화. [사진 위키피디아]

피렌체를 떠나 이사한 곳이 지금의 마키아벨리의 집이다. ‘나쁜 호텔’(L‘Albergaccio)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집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마키아벨리에게 정신적 환풍구 역할을 해준 곳은 집 앞의 여관을 겸하던 선술집이었다. 단골 자리인 벽난로 근처에 앉아 오가는 여행자들과 와인잔을 주고받으며 세상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도 다시 와 푸줏간 주인, 밀가루 장수, 벽돌공 등과 어울려 돈을 걸고 카드와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큰소리로 욕설도 질렀다고 한다.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1513년 12월 10일의 편지에 그 이유가 적혀 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뇌에 눌어붙은 곰팡이를 긁어내고 나를 향한 운명의 장난에 분노를 터뜨리는 것일세.”

마음의 독(毒)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렸을 테니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면 공감한다. 갑자기 다른 얼굴의 마키아벨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냉혹한 현실정치를 논하던 얼굴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생활을 꾸려나가던 ‘글로생활자’의 얼굴이었다. 그보다 10살 많은 나이에 세상에 던져진 나도 길을 잃고 허둥대고 있는데, 그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검은 수탉이 상징인 키안티 클라시코 문양. [사진 위키피디아]

검은 수탉이 상징인 키안티 클라시코 문양. [사진 위키피디아]

선술집은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집과 함께 와인 회사 그루포 이탈리아노 비니가 인수해 운영 중이다. 식당 이용객은 마키아벨리의 집을 무료 견학할 수 있다기에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그의 집으로 향했다. 1층 한쪽 방이 작업실로 군주론을 쓴 책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여우 같은 지혜와 사자 같은 용기를 갖춘 리더의 출현을 강조하던 바로 그 책상이다. 책상 위에 남아 있는 검은 자국 두어 개가 보였다. 글을 쓰던 잉크 자국일까? 아니면 마시던 와인 자국일까? 이어 오랜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지하 포도주 저장고로 안내됐다. 캄캄하고 서늘한 지하 대형 오크통에서 옛날처럼 와인을 숙성 중이었다. 올리브와 포도밭으로 가득한 집 주변 곳곳에 보이던 ‘갈로 네로’(Gallo Nero) 문양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어로 검정색 수탉을 의미하는 것으로 붉은 둥근 원에 그려진 키안티 클라시코 특유의 심볼이다. 이곳이 키안티 지방에서도 상급인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 집 건너편에 있는 선술집 내부 풍경. [사진 손관승]

마키아벨리 집 건너편에 있는 선술집 내부 풍경. [사진 손관승]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가 술을 즐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전하고 있지만, 마키아벨리 집 안내 직원은 그가 와인을 즐겼다고 단언한다. 어두운 지하 저장고에서 조심스레 포도주를 들고 나와 글 쓰는 작업실로 향하는 마키아벨리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놀랍게도 지하 와인 저장고에서 건너편 선술집으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있었다. 주요 인물을 만날 때는 주변의 눈길을 피해 이곳을 활용했다고 하니 세상과 단절된 그에게 유일한 통로였던 셈이다.

짓이김 당하고 발효돼 역작 탄생

견학을 마치고 나오다 보니 마키아벨리 얼굴과 500이란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와인병이 눈에 띄었다. 스탠다드 용량의 2배인 1500㏄ 매그넘 사이즈, 군주론 50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근처에서 수확한 산지오베제 품종을 마키아벨리의 집 지하에서 숙성했다는 설명이다. 물론 군주론의 명성을 이용한 상술이겠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와인 한 병을 가슴에 품고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멀리 피렌체가 보였다.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바로 그 도시였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년 동안 글을 쓰다가 인생을 마감한다.

포도를 짓이겨 발효시키지 않으면 포도주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짓이김 당한 그의 상처가 아니었다면 군주론은 탄생하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피렌체가 갑자기 내가 일하던 여의도처럼 보였다. 설명하기 힘든 마음 속의 감정을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과 글을 결합한 나의 ‘와글와글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군주론이 나온 지 꼭 500년 뒤였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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