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내부 총질’ 메시지 노출 사태가 국민의힘을 뒤흔들고 있다. 이준석 대표가 지난 8일 ‘당원권 정지 6개월’ 중징계를 받은 이후 유지되던 권성동 원내대표의 ‘대표 직무대행 체제’를 끝내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여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배현진 최고위원은 29일 오전에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전격적으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1시간여의 회의를 마치고 나온 배 최고위원은 기자들과 만나 “윤석열 정부 출범 후 80여일이 되도록 국민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다”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해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퇴는) 이 대표의 공백 사태가 생길 때부터 고민해 온 일”고 덧붙였다.
배 최고위원의 사퇴는 일종의 ‘총대 메기’ 성격에 가깝다. 지난 11일 의원총회에서 권 대행 체제가 승인된 이후에도 여권에선 “성과를 내야 하는 윤석열 정부 초반에 여당이 직무대행 체제로 6개월을 보낼 수는 없다”는 주장이 친윤계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그러다 지난 15일 대통령실 전직 행정요원 우모씨의 ‘사적 채용’ 논란 때 권 대행의 실언 문제가 불거졌고, 지난 26일에는 윤 대통령이 보낸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 텔레그램 메시지를 권 대행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언론 카메라에 노출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대통령실을 포함한 여권에선 권 대행을 향한 불만이 커졌고, 배 최고위원이 이런 흐름 속에서 최고위원직을 던진 것이다.
이날 취재진에 사퇴 의사를 밝히기에 앞서 비공개 최고위에서도 배 최고위원은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다른 최고위원의 연쇄 사퇴로 이어지진 않았다. “최고위가 사퇴하고 비대위로 가도 이준석 대표가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하면 인용 가능성이 크다”거나 “최고위원 전원이 사퇴하지 않으면 비대위로 가는 건 판례상 불가능하다”는 반대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친윤계에 가까운 조수진 최고위원도 “사퇴하려면 모두 함께 사퇴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비공개 회의 때 주로 듣는 데 집중했던 권 대행은 회의가 끝나갈 무렵 “이 모든 상황이 내 책임”이라며 회의를 마무리지었다.
최고위는 이날 오전 10시 즈음 이렇게 끝났지만 비슷한 시간 초선 의원 63명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선 비대위 전환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판장이 올라왔다. 박수영 의원이 배 최고위원의 사퇴를 거론하며 “최고위원직을 던진 결단을 존중하며 신속한 비대위 전환을 촉구합니다”라는 성명서 초안을 올렸고, 여기에 의원들의 동의를 요청한 것이다. 이날 오후 과반인 32명의 동의를 얻자 박 의원은 연판장을 권 대행 등 지도부에 전달했다. 박 의원은 그런 뒤 페이스북에 “선당후사(先黨後私·개인의 안위보다 당을 위해 희생한다)의 큰 결단을 기다리겠다”고 적었고, 기자들과 만나서는 “지도부의 결단을 보고, 그게 선당후사의 노력이면 (초선 의원들이) 더 이상 모일 필요가 없고, 그게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다시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대위 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추가 행동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권 대행은 “비대위 전환에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일단 당장 비대위 체제로 가기는 쉽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날 보수 성향 시민단체 ‘공정한 나라’ 발족 행사 뒤 기자들과 만나 “과거 전례를 보면 최고위원들이 총사퇴를 한 후에 비대위가 구성됐다. 일부가 사퇴한 상태에서 비대위가 구성된 전례는 없다”고 말했다. 재적 최고위원 중 과반이 궐위되면 비대위를 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전원이 사퇴해야 가능하다는 해석이다. 당내에선 권 대행이 당초 최고위원직 사퇴를 고민하던 일부 최고위원에게 “기다려 달라. 내가 비대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말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렇게 되자 여권에선 갈등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동안은 이준석 대표 측과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 그룹의 갈등이었는데, 비대위 문제에 대해선 윤핵관 그룹 내부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배현진 최고위원과 박수영 의원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때 각각 당선인 대변인과 기획조정분과 인수위원을 지냈다. 인수위 이후에는 친윤계이면서 당선인 비서실장 출신의 장제원 의원과 소통하는 관계로 알려져 있다.
친윤계 의원들 사이에선 전날 윤 대통령과 권 대행이 대통령 전용기에서 티타임을 한 것과 관련해 “윤 대통령과 권 대행의 대화 분위기가 잘못 전달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당시 일부 참석자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았다”고 전해 ‘윤 대통령이 권 대행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다른 측에선 “윤 대통령은 권 대행 체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일부 강경한 친윤계 그룹에선 “권 대행이 비대위 전환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직무대행뿐 아니라 원내대표 역할도 하기 어렵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차기 당권 주자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동안 신중론을 펴던 안철수 의원은 이날 “(권 대행이) 재신임이 안 되면 조기 전당대회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찍부터 조기 전당대회 주장을 펴온 김기현 의원은 페이스북에 오전엔 “비상한 시기엔 비상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적었고, 오후엔 “누란지위(累卵之危· 아주 위태로운 지경), 사즉필생 (死卽必生·죽고자 하면 산다), 선당후사”라고 적었다.
여권에선 이번 갈등이 쉽게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친윤계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이준석 대표가 6개월의 직무 정지가 끝난 뒤에 대표직에 복귀할 수 없는 것이고, 이를 위해선 6개월이 지나기 전에 현 지도부가 붕괴돼야 하기 때문이다. 여권 관계자는 “‘내부 총질’ 메시지가 공개된 뒤 권 대행에 대한 대통령실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건 분명하다”며 “주말 사이 양측이 서로를 어떻게 설득하는지에 따라 여당 갈등이 분수령을 맞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내에선 “최고위원들이 사퇴를 안 하면 내주에 의원총회를 열어 비대위 전환을 촉구하는 결의를 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