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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책도 ‘축적의 시간’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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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지은 『축적의 시간』은 한국이 그동안 선진국들이 개발한 기술을 활용하는 전략으로 압축 성장에 성공했으나 선진국에 진입한 현재는 이 전략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진단한다. 교수들은 한국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수 있는 개념설계 역량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창조적 개념설계 역량이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을 ‘축적’해야 얻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은 한국 산업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해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축적의 시간’은 한국 산업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를 벗어난 국가 중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를 함께 이룬 대표적 성공 사례다. 한국 민주주의가 4·19 혁명, 6월 항쟁, 2016년 촛불시위 등을 통해 큰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대화와 타협을 통한 시민 담론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미흡하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대통령이나 장관 등이 정책을 지시하는 하향식 의사결정에 익숙하다. 시민 논의를 통해 정책이 형성되는 상향식 의사결정은 드물다.

좋은 정책도 국민 동의·설득 필요
일방적 경찰국 설치가 반발 불러
사회적 합의 토대위 정책 추진해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 게양된 경찰청 깃발. 경찰국 설립을 놓고 경찰이 반발하고 있다. [뉴스1]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 게양된 경찰청 깃발. 경찰국 설립을 놓고 경찰이 반발하고 있다. [뉴스1]

권위주의에 비해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지도자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반면 민주주의는 시민 여론을 형성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적지 않게 든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합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책에 대한 반감이 적어 결국 더 효율적인 정책 집행이 가능하다. 민주주의 체제는 시끄럽고 우왕좌왕하는 것 같지만 의견 수렴을 통해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권위주의 체제보다 체제 영속성이 높다.

최근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설치 문제로 시끄럽다. 정부는 ‘검수완박’법으로 권한이 커진 경찰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려면 경찰국 설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대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경찰청을 통제했는데 이는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정조직 내에서 통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내세운다. 이에 대해 상당수 경찰은 행안부가 경찰청의 인사·예산을 장악해 독립성을 해치고 정권 입맛에 맞는 수사를 지시할 수 있다며 반발한다. 경찰국 설립 없이 현재 행안부에 설치된 국가경찰위원회를 통해 경찰청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경찰청이 1991년 이전 내무부(현 행안부) 내 치안본부 시절 선거 범죄 수사 등에서 정치적 중립을 훼손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권한이 커진 경찰청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은 필요하다. 정부조직법상 경찰청이 행안부의 외청인 만큼 행안부 장관이 경찰의 인사·예산을 관할하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영국·독일·프랑스의 경우 내무부가 경찰청의 인사·예산을 통제한다.

문제는 정권의 경찰 장악 아니냐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찰국 설치가 밀어붙여졌다는 점이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지난달 27일 경찰국 신설 방침을 공식화한 지 한 달 만인 지난 26일 국무회의에서 관련 시행령을 의결했다. 경찰은 지난 23일 전국 서장회의를 여는 등 반발하고 있다.

경찰국 설치 논란은 정부가 경찰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속전속결로 처리하려다 사태를 키운 측면이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이해 당사자가 동의하고 협력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실행하기 어렵다. 경찰청의 민주적 통제 같은 중요 정책은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시행하는 게 순리였다. 대화와 타협, 설득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정부는 2008년 4~7월 발생한 광우병 사태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건강 우려에도 광우병 위험 부위의 수입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된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의 일방적 결정으로 국민 동의나 신뢰가 무너지며 연인원 100만 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로 정권이 위기를 맞았다.

경찰국 논란이나 대통령실 용산 이전에서 보듯 윤석열 정부는 정책을 밀어붙이듯 추진한다는 인상을 준다. 취임 2개월여 만에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부정 평가가 60%를 넘는 것에서 보듯 일방적 정책 추진은 국민 동의를 받지 못한다. 한국 산업이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을 축적해 개념설계 역량을 확보해야 하듯 한국 사회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주주의 경험을 쌓아야 명실상부한 선진 사회로 도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