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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지키려 독재하겠다? '아랍의 봄' 튀니지의 로보캅 대통령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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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개헌은 (독재가 아닌) 자유를 위한 일입니다.”

26일(현지시간) 북아프리카의 소국 튀니지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한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투표율 30.5%, 찬성 94.6%)하자, 카이스 사이에드(64) 대통령이 이렇게 외쳤다.

소신있는 헌법학자, 청렴한 정치신인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었던 사이에드는 이번 개헌을 통해 의회 동의없이 행정부와 사법부를 임명해 구성하고 해산할 권한을 갖는 등, 사실상 아무런 통제 없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

 카이스 사이에드 튀니지 대통령이 지난 2020년 2월 27일 수도 튀니스 대통령궁에서 열린 새 정부 취임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카이스 사이에드 튀니지 대통령이 지난 2020년 2월 27일 수도 튀니스 대통령궁에서 열린 새 정부 취임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아랍의 봄’ 발원지, 경제난에 민주화 삐걱 

튀니지는 2010년 12월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의 물결이 시작된 곳이다. 무려 23년(1987~2011)간 철권을 휘두르던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1936~2019)을 축출한 뒤, 아랍권에서 유일하게 민주정부 수립에 성공한 국가다.

아랍의 봄 성공 이후인 2014년 1월 개정된 튀니지의 새 헌법은 아랍국가 중 가장 민주적인 내용으로 평가받는다. 그해 11월엔 튀니지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절차에 따라 베테랑 정치인 베지 카이드 에셉시를 대통령(1926~2019)으로 선출했다.

이처럼 튀니지는 아랍의 봄을 겪었지만 내전으로 엉망이 된 시리아·리비아·예멘, 민주화 움직임을 겪다 군부독재로 회귀한 이집트와는 차원이 다른 길을 걸었다. 일각에선 튀니지를 '중동 민주주의의 모델'이라 치켜세웠을 정도다.

하지만 튀지니의 민주화 행보는 경제난에 발목잡혔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2018년 튀니지의 청년 실업률은 35%, 국가 실업률은 15%였다. 아랍의 봄이 터진 가장 큰 이유가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에 따른 청년층의 분노였는데, 첫 민선 대통령마저 이를 해결하지 못하자 무능한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과 실망감이 커졌다.

정치 초보, 법 존중하는 바른 이미지로 당선 

사이에드 대통령(오른쪽)이 25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의 한 투표소에서 아내 이크라프 셰빌(왼쪽)과 개헌안 관련 국민투표를 하고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사이에드 대통령(오른쪽)이 25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의 한 투표소에서 아내 이크라프 셰빌(왼쪽)과 개헌안 관련 국민투표를 하고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사이에드는 2019년 10월 대선을 앞두고 전문성과 청렴함·공정의 이미지로 튀니지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 튀니스대학을 졸업하고 20년간 대학 강단에 선 헌법 전문가다. 아랍의 봄 직후 개헌을 둘러싼 논쟁 때 TV 방송에 자주 출연하며 인지도를 쌓은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특히 세련된 표준 아랍어를 구사하며, '로보캅'이라 불릴 정도로 차분하고 직설적인 말투는 대중에게 '유능하고 소신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대선 결선 투표를 일주일 앞두고 상대 후보인 나빌 카루이가 수감되자, 사이에드는 "나 혼자 선거 운동을 하는 건 불공정하다"며 자신도 선거 운동을 멈춘 일이 있었다. 부정부패에 질렸던 대중들은 기존 정치인과 다른 참신한 그의 행보에 매료됐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사이에드는 결국 대선 결선투표에서 72.72%를 득표해 압승을 거뒀다. 18∼25세 유권자가 몰표(90%)를 줬다. 청년층은 "사이에드는 헌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실력자"라며 그에게 열광했다.

민주헌법 무효화…"독재 아닌 자유 위해" 

개헌을 반대하는 튀니지인들이 지난 19일 튀니스 거리에서 개헌안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개헌을 반대하는 튀니지인들이 지난 19일 튀니스 거리에서 개헌안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튀니지 국민의 열광적 기대와 달리, 사이에드 정권 출범 이래 튀니지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에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가 겹친 탓이 크다.

지난해 튀지니의 국가 실업률은 18%, 그 중 청년 실업률은 40%였다. 공공부문에서는 임금 지급이 지연되기까지 했다. 올해 물가상승률은 7.8%인데,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주식인 밀 가격은 10년 만에 최고가다.

극심한 생활고와 이로 인한 민심 이반에, 사이에드 대통령은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는 "권력을 의회와 대통령, 둘로 분할하는 헌법 때문에 튀니지는 수년간 정치적 마비를 겪고 경제가 침체했다"면서 "독재가 아닌 자유를 위해 개헌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26일 통과된 새 헌법에 대해, 전문가들은 "2014년 개헌 이후 만든 민주헌법의 주요 성과를 대부분 무효화하고 사실상 2011년 아랍의 봄 이전의 정치 권력체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개헌안에 따르면,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과 판사를 임명할 수 있고, 의회도 해산할 수 있다. 군 통수권도 갖는다. 대통령이 임명한 행정부는 의회 신임 투표도 받지 않는다. 원래 한차례 연임 가능했던 대통령 임기는 ‘임박한 위험’을 이유로 대통령이 임의로 연장할 수 있다.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튀니지의 새 헌법은 견제와 균형을 약화하고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거대한 정치권력을 휘두를 것 같지 않았던 사이에드 대통령이 민주주의 해체에 나섰다"고 전했다.

일부 "막강 권력에도 경제난 타개 희망"

사이에드 대통령을 지지하는 튀니지인들이 25일 밤 튀니스 거리에 모여 국민투표 출구조사에서 찬성률이 압도적으로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사이에드 대통령을 지지하는 튀니지인들이 25일 밤 튀니스 거리에 모여 국민투표 출구조사에서 찬성률이 압도적으로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튀니지 국내에는 사이에드 대통령이 개헌을 통해 손에 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경제난을 해결할 거란 기대감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다. 수도 튀니스에 거주하는 청년 살렘 아비디는 "사이에드 대통령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면서 "이제 그가 할 일은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했다.

개헌까지 감행한 사이에드 정부의 성적표는 생각보다 빨리 나올 수 있다. 현재 튀니지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40억 달러(약 5조200억원) 규모의 자금 지원을 요청하고 협상 중이다. IMF가 정부 지원 축소를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내걸자, 튀니지 정부는 임금 동결 등이 포함된 경제 개혁안을 발표했다. AFP는 "이번 협상이 튀니지 경제난을 가중시킬 수 있다"며 "권력이 커진 사이에드 대통령에 대한 민심의 향방을 가르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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