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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전사 아버지 추억할 공간 생겨…한국인들께 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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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아버지는 내가 8개월 때 한국전쟁에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 없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선물해 준 한국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미국 수도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26일(현지시간) 만난 베스 빈센트(70)는 ‘추모의 벽’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버지 고(故) 멜빈 엘리자 클로버 공군 중위가 몰던 전투기는 1952년 10월 14일 북한 지역에서 교전 중 추락했으며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는 추모의 벽이 완공됐다는 소식에 중부 미주리주 소도시 워런턴에서 남편·손녀와 꼬박 이틀간 차를 몰고 워싱턴에 왔다. 그의 손녀는 “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를 보고 싶을 때 사진을 꺼내 어루만지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추모의 벽이 들어선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추모의 벽이 들어선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6·25전쟁의 미군 전사자 3만6634명과 주한미군 배속 한국군(카투사) 전사자 7174명 등 모두 4만3808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긴 추모의 벽이 완공돼 이날 유족들에게 처음 공개됐다. 2021년 5월 착공 이후 15개월 만이다. 1995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된 지 27년 만에 중요한 조형물이 더해졌다. 미국 내 참전 기념 시설에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 전사자 이름을 새긴 것은 처음이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69주년인 27일(현지시간) 추모의 벽 준공식이 열렸다. 한국 측에선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보훈처장, 국회 이헌승 국방위원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등이 참석해 참전용사들을 추모했다. 미국 측에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남편인 더그 엠호프 세컨드젠틀맨,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아미 베라 하원 외교위원회 아태 소위원장 등이 현장을 찾았다. 참전용사와 유가족, 한·미 단체 회원 등 모두 300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은 8903㎡의 넓이로 미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전쟁기념 시설이다. 추모의 벽은 미국 비영리단체인 한국전참전용사기념재단(KWVMF)이 주도하고, 한국 정부가 사업비 2420만 달러(약 317억원) 중 2360만 달러(약 310억원)를 지원해 건립됐다. 나머지는 KWVMF, 재향군인회, 한미동맹재단, 양국 국민 성금으로 채웠다. SK 100만 달러, 풍산 110만 달러 등 기업도 후원했다.

추모의 벽은 공원 내 추모의 연못을 둘러싸고 100개의 화강암 판을 비스듬히 앉혔다. 첫 84개 판은 육군, 다음 10개는 해병대, 해군은 2개, 공군은 4개 판에 전사자 이름을 이병부터 장군 순서로, 성을 알파벳순으로 새겼다. 카투사 전사자도 알파벳순에 따라 미군과 섞여 각인됐다. 리처드 딘 KWVMF 부회장은 “미군과 카투사는 함께 싸웠고 함께 숭고한 희생을 했기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고 말했다.

카투사 전사자 아들인 한신희(72)씨는 추모의 벽에서 아버지 이름 ‘SANG SUN HAN(한상순)’을 찾아 탁본을 떴다. 한상순씨는 미군 제7사단 17연대에 배속돼 복무하다 경기도 연천군 천덕산 ‘폭찹힐 고지 전투’에서 중국군과 싸우다 53년 7월 전사했다. 아들 한씨는 “아버지가 하늘에서 전우들과 함께 기억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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