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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억 공연 포기, 후회 없어요"…박상민 '격투기 대부'된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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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로드FC 부대표를 맡아 격투기 붐업을 위해 힘쓰는 가수 박상민. 주말마다 수십억 공연을 포기하고, 경기장을 달려갔다. [사진 로드FC]

10년째 로드FC 부대표를 맡아 격투기 붐업을 위해 힘쓰는 가수 박상민. 주말마다 수십억 공연을 포기하고, 경기장을 달려갔다. [사진 로드FC]

"방송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잠도 안 자고 달려왔어요. 친동생 같은 우리 선수들 경기 못 볼까 봐요.(웃음)"

가수 박상민(58)의 스케줄표엔 격투기 경기장을 찾는 일정이 잔뜩 있다. '데뷔 30년차 베테랑 가수' '대한가수협회 이사' 외에도 직함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 종합격투기 단체 로드FC의 부대표다. 올해로 10년째다.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에 선글라스와 중절모를 쓴 그를 팬과 선수들은 '격투기계의 대부'라고 부른다. 지난 23일 로드FC 대회가 열린 강원도 원주종합체육관에서 만난 박상민은 "케이지(격투기 경기장)가 공연 무대처럼 편안하다. 격투기 대회를 잘 치르면 마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 같다. 내 삶의 일부"라고 말했다.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한 베테랑 가수 박상민. 슬램덩크 주제가로 MZ세대 사이에서도 '국민 가수'로 통한다. [중앙포토]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한 베테랑 가수 박상민. 슬램덩크 주제가로 MZ세대 사이에서도 '국민 가수'로 통한다. [중앙포토]

허스키한 목소리에 뛰어난 가창력을 갖춘 박상민은 '멀어져 간 사람아' '무기여 잘 있거라' '하나의 사랑' '해바라기' 등 연이은 히트곡으로 1990~2000년대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하나의 사랑'은 격투기 선수 추성훈이 부르면서 재조명됐다. 10~20대 사이에서도 '국민 가수'로 통한다.

박상민은 우연히 본 TV 중계를 통해 격투기의 매력에 빠졌다. [사진 로드FC]

박상민은 우연히 본 TV 중계를 통해 격투기의 매력에 빠졌다. [사진 로드FC]

박상민은 2010년 로드FC와 인연을 맺었다. 연예계 소문난 스포츠광이었던 그는 원래 축구·야구·농구·핸드볼 등 구기 종목 경기장을 자주 찾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무명 선수와 비인기 종목 핸드볼을 돕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 우연히 TV에서 본 중계방송을 통해 격투기에 빠졌다. 체격이 작은 일본 선수가 환상적인 펀치로 거구의 서양 선수를 쓰러뜨리는 장면이었다.

그는 "주먹을 주고받는 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어린 시절 주변에 싸움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장난치고 까부는 데만 관심 있었다. 군대에선 고참들한테 날마다 두들겨 맞았지만, 후임을 때려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 본 격투기 경기에서 공으로 승부하는 스포츠에선 볼 수 없는 매력이어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박상민은 그 길로 국내 격투기 경기를 찾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 격투기는 걸음마 단계라서 경기가 드물게 열렸다. 2010년 창설된 로드FC가 사실상 꾸준히 경기를 여는 유일한 국내 격투기 대회였다.

연예계 소문난 스포츠광 박상민. 야구, 축구, 농구, 핸드볼 등 안 가본 경기장이 없다. [중앙포토]

연예계 소문난 스포츠광 박상민. 야구, 축구, 농구, 핸드볼 등 안 가본 경기장이 없다. [중앙포토]

박상민은 반가운 마음으로 로드FC의 문을 두드렸지만, 문전박대당했다. 격투기계가 그의 진정성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박상민은 "직접 표를 사서 경기장을 갔는데도 격투기 관계자들은 본 체도 안 했다. 나를 폼 잡기 위해 잠시 기웃대는 연예인 정도로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자존심 상하고 속상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박상민은 자발적으로 지인들을 찾아가 격투기 대회 후원을 부탁했다. 선수들의 결혼식에 제 발로 찾아가 축가를 불렀다.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진심은 통했다. 아낌없이 주는 그를 두고 격투기계에서 '큰 형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박상민은 "수개월을 격투기 선수들과 뒤엉켜 살다 보니, 로드FC 측에서 부대표직을 제안하더라. 무보수 직책이었지만, 마침내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고 말했다.

격투기는 박상민에게 대리만족이었다. [사진 로드FC]

격투기는 박상민에게 대리만족이었다. [사진 로드FC]

박상민은 이때부터 격투기계의 발전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대회가 열리는 주말엔 공연을 포기하고 가장 먼저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출연료는커녕 선수들에게 자비로 용돈과 밥값을 내기 일쑤였다. 적은 대전료를 받고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들이 안쓰러웠기 때문에 기꺼이 도왔다. 후배 가수들을 초청해 축하 공연을 부탁하기도 했다.

박상민은 "지난 10년간 격투기 경기장을 찾는 대신 주말 공연을 했다면 수십억 원을 벌었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매니저는 내가 돈 벌 기회를 포기했다고 속상해하지만, 나는 정직한 땀방울 흘리는 선수들의 처우가 조금이라도 개선된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격투기 대회를 치르고 회식을 할 땐 1990년대 '가요 톱 텐(음악 순위 프로)' 끝나고 가수 선후배들끼리 모여서 밤늦게까지 회식하는 느낌이다. 그만큼 이곳이 편하다"면서 "요즘 나를 격투기인으로 인정 안 하는 선수나 관계자가 있으면 혼쭐을 낸다. 이젠 나다 당당한 격투기 선배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박상민은 "로드FC가 BTS 공연을 놓친 건 아쉬운 순간"이라고 말했다. [사진 빅히트뮤직]

박상민은 "로드FC가 BTS 공연을 놓친 건 아쉬운 순간"이라고 말했다. [사진 빅히트뮤직]

아쉬웠던 순간도 있다. 그는, '방탄소년단(BTS)을 놓친 사건'을 꼽았다. 박상민은 "BTS가 신인이던 시절 로드FC 대회 공연을 추진하다 무산된 적이 있다. 그 얘기를 나중에 관계자를 통해 듣고 너무 아쉬웠다"고 떠올렸다.

그는 "당시 나에게 미리 알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연을 성사했을 것이다. 나였다면 가수가 신인이든, 아니든 따지지 않고 협업을 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농담 섞인 이야기였지만, 현재 월드 스타가 된 BTS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일화라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다.

로드FC 홍보대사 출신 격투기 스타 밥 샙(왼쪽)과 박상민. [사진 로드FC]

로드FC 홍보대사 출신 격투기 스타 밥 샙(왼쪽)과 박상민. [사진 로드FC]

로드FC는 13년 동안 61회의 공식 대회를 치른 국내 최대 격투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박상민은 선수들을 이끌고 '선행 프로젝트'에 나섰다. 각 체급 챔피언, 유명 선수들 함께 전국 중·고교를 돌며 일진 학생 모아 학교폭력 예방 교실을 열었다. 무료 강습을 통해 폭력 대신 격투기 훈련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도록 권유했다. 불우이웃 돕기에도 동참했다.

박상민은 "방송국에서 출연자 펑크가 나면 가장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 박상민이다. '대타'라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어려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대신 출연한다. 격투기도 팬과 이웃이 어려울 때 생각나고 필요한 존재가 됐으면 했기에 거리로 나서서 학생과 시민들을 만났다"며 프로젝트 배경을 설명했다.

남에게 베푸는 버릇은 박상민의 집안 내력이다. [뉴스1]

남에게 베푸는 버릇은 박상민의 집안 내력이다. [뉴스1]

남에게 베푸는 버릇은 박상민의 집안 내력이다. 어린 시절 그의 부모는 경기도 평택 통복시장에서 30년간 채소 가게를 했는데,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늘 이웃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돈을 꿔주고 아버지는 쌀농사가 끝나면 매년 인근 양로원에 몇 가마니씩 두고 왔다. 박상민은 "어렸을 땐 한겨울에 동상 걸려가며 남의 가게 모퉁이서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이 창피해 친구들이 놀러 오면 숨었다. 정작 우리 가족이 어려운데, 왜 남을 돕는지 이해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부모님처럼 하고 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박상민은 25년 전 공연 수익 8000만원 전액을 고향 평택의 무의탁 노인과 결식아동에게 전하면서 첫 기부를 시작했다. 2008년엔 10여년간 40억원 넘는 돈을 기부한 공로로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표창을 받았고, 2013년엔 나눔봉사 부문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코로나19로 공연이 줄어들자, 자선 공연으로 기부금을 모금했다.

챔피언 벨트를 따낸 뒤 울먹이는 김수철(왼쪽 둘째)와 박상민(가운데). [사진 로드FC]

챔피언 벨트를 따낸 뒤 울먹이는 김수철(왼쪽 둘째)와 박상민(가운데). [사진 로드FC]

박상민은 다음 달 평택에서 2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연다. 연말까지 전국 투어도 계획 중이다. '격투기왕과 가수왕 자리를 모두 지키기 위한 행보'냐고 물었다. 그는 "사람들 소원이 '부자 되는 것'과 '건강 지키기'인데, 생각해보면 둘 다 코로나만 종식되면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전세계에 코로나가 퍼진 탓에 다들 무기력하고, 미워하는 것 같다. 하루빨리 완벽한 일상을 되찾고, 삶의 즐거움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한다"고 콘서트 취지를 전했다.

그는 이어 "열심히 공연해서 격투기 선수들 더 챙겨주고 싶다. 격투기 전용경기장을 지어서 축구 스타 손흥민의 소속팀인 토트넘 방한 경기처럼 관중석 가득 채우고 경기하는 꿈을 꾼다"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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