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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이준석은 생환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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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나지막한 음성에 왠지 자신 없게 들리는 목소리 톤. 평소 확신에 찬 어조,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언변의 그와는 사뭇 다른 듯했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예.예.”를 몇 차례 되풀이하더니 이내 “사람을 하나 보내면 혹시 만나볼 수 있으세요?”라고 ‘급제안’을 던지기도 했다. 지난 4월 성접대 증거인멸 교사 의혹과 함께 공개된 ‘2021년 12월 27일 밤 10시51분 통화록’ 속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음성이다.

평소와는 다른 이 대표의 표정과 말투를 접할 기회는 얼마 전 또 있었다. 지난 7일 밤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에 출석하는 장면. 굳은 얼굴의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더니 감정이 북받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다음날 새벽 2시45분 발표된 이 대표에 대한 당 윤리위의 결정은 당원권 정지 6개월.

중징계 뒤 전국 돌며 장외정치
경찰 수사가 정치생명 가를 듯
‘기술’보다 성숙한 리더십 갖춰야

지난 7일 밤 국회 본청에서 열린 당 윤리위원회에 출석하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취재진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이 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윤리위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지난 7일 밤 국회 본청에서 열린 당 윤리위원회에 출석하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취재진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이 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윤리위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중징계 결정을 받아든 이 대표의 다음 행보는 여러모로 예상외다. ‘일전 불사’ 예고와는 달리 윤리위 재심 청구를 포기했고, 징계효력정지 가처분 신청도 뜻을 접은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진지전을 대비한 장외 싸움에 올인한 듯하다. 제주·광주·목포·순천·진주·창원·부산·춘천·전주 등 전국을 돌며 보란 듯 유랑 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연일 “당원 가입하기 좋은 날”이라는 SNS 글을 띄우며 청년층 우군 확보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전략이 먹힌 걸까. ‘이 대표와의 만남’을 신청한 이들은 어느덧 8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2030 세대 남성 이용자가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 에펨코리아에선 “준석이 보고 싶다”는 글이 곧잘 올라온다. 차기 국민의힘 대표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한다. 지난 16~18일 조원씨앤아이 조사에서 이 대표 지지율은 25.2%로, 2위 안철수 의원(18.3%)을 제쳤다. 특히 18~29세에서 33.1%로 큰 지지를 받은 게 눈길을 끈다(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 대표가 빠진 뒤의 국민의힘은? 직무대행 체제냐, 조기 전당대회냐 등을 놓고 분열상을 노출하더니 ‘안장(안철수·장제원)’ ‘김장(김기현·장제원)’에 이어 ‘철권(안철수·권성동)’ 연대설 등 차기 당권 주자들의 이름이 우스꽝스럽게 조합된 헤게모니 싸움 얘기가 요란하다. 집권 여당의 이런 권력투쟁 양상은 ‘이준석 축출설’이 그저 풍문만은 아닐 거란 일각의 의심을 키울 수 있다. 여당의 자중지란 와중에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30%대 초반까지 밀린 상태다.

이 대표는 여의도로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일단 성접대 의혹에 대한 경찰 수사가 중대 기로가 될 수밖에 없다. 혐의를 벗는다면, 당 대표직에 복귀하고 혁신위 등 전열을 정비하면서 당내 기반을 다져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정치 생명에 최대 위기를 맞을 게 자명하다. 대표직 불명예 사퇴는 물론 윤리위에서 추가 징계가 논의될 수 있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 무적(無籍) 기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이 대표의 정치 미래는 기회와 위험 요인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2030 세대 남성의 조직적 지지, 이 대표가 장외에서 끌어모으고 있는 신규 당원들은 그에게 우군이 될 수 있다. 이 대표도 이걸 노렸음직하다. 그를 두고 “플러스(+), 마이너스(-)로 계산해보면 지지 확보에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4월 7일)고 한 김기현 전 원내대표의 평가처럼 지난 대선 때 이 대표의 젠더 갈라치기 전략은 결과적으로 득이 있었다는 게 여권 내 다수의 인식이다.

이렇듯 ‘정치 테크닉’ 면에선 프로 기술자가 된 듯한 이 대표지만 ‘정치 철학’ 면에선 아직 큰 의문부호가 따른다. 그는 반페미니즘, 불공정 등 2030 남성들에 응축된 불만에 불을 댕겨 세력화하는 정치 전략을 펴 왔다. ‘윤핵관’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설전, ‘봉숭아학당’이 돼버린 당 지도부 회의 등 분열의 아이콘 이미지도 강하다. 재(才)뿐 아니라 덕(德)도 함께 갖춘 성숙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앞으로 특정 성별과 세대, 이념을 넘어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인 시대 정신, 담대한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세대포위론이나 갈라치기 같은 수는 언젠가 패착이 될 수 있다.

이 대표가 자신에게 정치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라고 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며칠 전 방송에서 이런 조언을 했다. “이 대표는 지금 정치적으로 소생을 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 행위를 해 나가느냐가 본인의 미래에 있어 제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