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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여행에의 초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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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내 사랑, 내 누이야,/꿈꾸어 보렴 거기 가서/단 둘이서 사는 달콤한 행복을!/한가로이 사랑하며/사랑하며 죽을 것을,/너를 닮은 그 나라에서!/흐린 하늘의/안개서린 태양은/내 영혼엔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눈물을 통해 반짝이는/변덕스런 네 눈처럼//그곳은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호사, 고요, 그리고 쾌락.”

프랑스 최고의 시인 샤를르 보들레르는 시 ‘여행에의 초대’에서 동경하던 홀랜드로 가 안정된 가정생활을 꾸며보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터져 나온 여행에 대한 갈증
고행길 해외여행도 각오해야
여행엔 매력과 함께 위험도

비단 19세기의 보들레르만이 아니라 2년 반 동안 코로나바이러스의 위세에 꼼짝 못 하고 갇혀 있던 사람들의 여행 욕구가 활화산처럼 분출하고 있습니다. 제가 매일 출근하는 운니동 골목길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현저하게 늘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이 조금 느슨해지면서 한국인들의 그룹투어 관광단이 가까운 일본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유럽행 항공기는 만원이라고 합니다. 코로나19는 6차 대유행에 이르렀습니다만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지 않는 한 터져 나온 여행에의 갈증은 멈추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파로 지난 2년 인원을 대폭 줄였던 세계 항공계와 공항들, 여행 관련 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앞으로 1년여 해외여행에 나서는 사람들은 고행을 각오해야 할듯합니다.

만권의 책을 읽고(讀萬卷書) 만리의 길을 가며(行萬里路) 만명의 벗을 사귀는 것(交萬人友)이 인생일진데, 여행에의 욕구는 인간이 가진 본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보들레르가 말하는 가슴 설레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지의 세계로의 여정은 예상할 수 없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큰 부상을 입는 수도 있고,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10여 년 전 아내와 함께 체코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프라하에서 실내가 넓은 고풍스런 호텔에 들었는데, 아침에 샤워를 하던 아내가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사고가 난 것입니다.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아내를 끌어안으며 절망에 몸부림쳤었지요. 앰뷸런스를 불러 프라하 공립병원 응급실로 옮겨 엑스레이를 찍고 입원했습니다. 아내는 갈비뼈가 여섯 개나 부러진 상태였습니다. 체코 병원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상반신을 붕대로 꽁꽁 묶은 채 프라하 국제공항으로 갔었지요. 휠체어를 탄 아내와 저를 본 승무원은 “일단 비행기를 타시면 한국까지 가는 동안에 비상 착륙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책임은 남편인 제가 지겠다는 서명을 하고, 마일리지로 업그레이드해 프레스티지 클래스에 탑승한 뒤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아내를 달래며 긴 비행을 견뎌야 했습니다. 아, 그 여행은 제 생애 가장 힘들고 슬픈 것이었습니다.

제가 본 영화의 장면 가운데 가장 슬펐던 것은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알마시 백작과 정부(情婦) 캐서린의 이별입니다. 사막 여행 중 사고로 중상을 입은 연인을 안고 헤매던 알마시의 절망에 가득찬 울음. 무엇이 나타날지도 모를 동굴에 여인을 눕혀두고 구조대를 찾아 걸어서 사막 횡단에 나서는 알마시에게 하는 말 “꼭 돌아온다고 약속해줘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미친 듯이 사막으로 뛰어드는 남자. 여행은 이렇듯 치명적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그래서 치명적인 사랑과 닮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행이란 이렇게 위험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피해야 하는 걸까요? 인류는 그 위험을 결코 피하지 않았습니다. 바다 건너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세상을 향해 무모한 항행을 감행했지요. 땅끝이란 누구에게는 세상의 끝이지만 누구에게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T. S. 엘리엇이 사랑이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시 ‘J. A. 프루프록의 연가’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여행은 위험하면서도 목숨을 걸 정도로 매력적인 것입니다. 한 달씩 여름휴가를 떠나는 유럽인들은 유서를 써두기도 합니다. 혹시 여행지에서 불행한 일을 당할 경우 유산상속에 대한 것이 주된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여. 아주 드물긴 하지만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십시오. 그 결심이 서면 떠나십시오.

“자, 그러면 이제 갑시다. 당신과 나/저녁이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에 펼쳐져 있을 때,/가봅시다, 반 쯤은 버려진 길들을 지나/값싼 호텔 안 지친 하룻밤의 중얼거림도 떠나가 버린/굴 껍데기와 톱밥 깔린 식당을 지나,/음흉한 의도가 깔린 지루한 논쟁처럼 따라오는 길들은,/당신을 압도적인 질문으로 데려가지요…/오, ‘그게 무엇인가요’ 묻지 마세요./가봅시다. 그리고 한 번 봅시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