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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남규의 글로벌 머니

‘자산시장 영웅’ 몰락의 길, 그대로 밟아가는 머스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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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영웅이 존재할 수 없는 곳.”

증권시장 창세기였던 17세기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나온 팸플릿에 묘사된 시장 속성이다. 그 시절 암스테르담은 서유럽 금융의 중심이었다. “당시 사람들 눈에 시장 참여자들은 아주 영악하고 셈에 너무 능해 한 사람을 영웅으로 떠받들기 어려운 군상으로 비쳤다”고 『금융투기의 역사』를 쓴 에드워드 챈슬러가 지난해 12월 기자와 통화에서 말했다.

그로부터 약 400년이 흘렀다. 산업혁명이 1~3차를 거쳐 4차(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새로운 자산도 등장했다.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이다. 그만큼 시장 참여자도 스마트해졌으리라!

그런데 가상자산 시장 참여자들이 한 영웅을 숭배하다 배신당한 모양새다. 바로 미국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다. 시장 참여자들이 테슬라의 등장에 환호했다. 그가 “사들였다”는 말 한마디에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달 21일 테슬라는 “비트코인 보유량 가운데 75% 정도를 올해 2분기 말 현재 법정화폐로 태환했다(converted)”고 공시했다.

비트코인 ‘안 판다’하고 75% 처분
“법정화폐 같다, 테슬라 결제 가능”
1년6개월간 쥐락펴락하더니 배신

자산시장 400년간 몰락 영웅 많아
‘우주의 지배자’처럼 말하고 행동
오만·변덕은 역풍 불러 결국 추락

“머스크의 배신” 비판 잇따라

일론 머스크

일론 머스크

테슬라가 쓴 태환이란 말은 ‘종이돈을 금으로 바꾸는 일’을 뜻한다. 금본위제가 사라진 요즘 통화이론가들이나 쓴다. 테슬라가 소수의 전문가가 쓰는 말을 썼다고 해서 ‘비트코인을 팔아치웠다’는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코인데스크 등 가상자산 진영의 미디어들이 일제히 이렇게 평했다. 그럴 만했다. 머스크는 올해 5월 비트코인 처분설이 나돌자 트위터를 통해 “팔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즈음 테슬라는 비트코인을 매각해 현찰 9억3600만 달러(약 1조2260억원)를 마련했다.

머스크가 할 말이 없지는 않다. 요즘 테슬라는 중국 공장의 가동 중단 등에 시달리고 있다. 경영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비트코인을 팔아 달러를 마련해야 했다는 얘기다. 이제 테슬라에 남아 있는 암호화폐 자산은 도지코인을 포함해 2억1800만 달러어치 정도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PHI토큰 개발자인 다니엘레 베르나르디는 “머스크가 최근 1년 6개월 사이 가상자산 시장의 리더, 아니 메시아였다”며 “그는 시장 참여자들이 느끼는 결핍을 해결해줄 듯했다”고 지난주 기자와 통화에서 말했다.

무슨 결핍일까. 가상자산 매수자들은 늘 제도권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 제도권 금융회사가 암호화폐 펀드를 설정하거나 증권거래소가 선물거래를 시작하거나 회사나 국가가 암호화폐를 결제수단으로 정하면 가상자산 매수자들은 환호했다. 마침 머스크가 “비트코인은 법정화폐나 다름없고 안정적”이라고 말했다(2020년 12월). 비트코인을 대량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한 걸음 더 나가 비트코인으로 테슬라 전기차를 살 수 있도록 했다. 순식간에 머스크는 가상자산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시장과 영웅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했다. 근대 자산시장 400년 역사를 보면 ‘영웅의 배신’ 서사로 가득하다. 프랑스 미시시피 거품(1719)의 주범인 존 로(1671~1729), 영국 사우스시 버블을 일으킨 존 블런트(1665~1733),  1840년대 철도거품의 핵심인 조지 허드슨(1800~1871), 1929년 대공황으로 이어진 거품의 영웅인 ‘성냥왕’ 이바르 크뤼게르, 2000년대 초 ‘닷컴 영웅’ 등이 대표적이다.

근대 시장에서 ‘몰락한 영웅’의 대명사인 존 블런트 사우스시 대표

근대 시장에서 ‘몰락한 영웅’의 대명사인 존 블런트 사우스시 대표

시장 영웅이 보이는 행태의 원형(archetype)에 대한 경제 역사가들의 연구는 꽤 이뤄졌다.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메리 모건 교수(경제사)는 “시장의 영웅은 ‘우주의 지배자(Master of Universe)’인 것처럼 행동한다”며 “자신이 한 분야의 기술을 혁신하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고 소개했다.

근대 자산시장 400년의 교훈

모건 교수는 “한때이기는 하지만 시장 참여자들이 영웅을 숭배한다. 그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부를 거머쥘 수 있을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우주의 지배자 이미지는 요즘 머스크의 언행과 오버랩된다. 그는 전기차 혁신가뿐 아니라 우주 개척차, 노령화·저출산 해결사인 듯하다.

역대 영웅들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오만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장 참여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 또한 머스크에서 엿보인다. 그는 트위터 팔로워 1억 명 이상을 거느리고 있다. 이를 통해 최근 1년 6개월 동안 비트코인 가격을 거의 쥐락펴락했다. 트위터 주식을 매집하고 인수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변덕을 일삼았다.

오만은 역풍을 부르기 마련이다. ‘월가의 교장’으로 불리는 켄 피셔 피셔인베스트먼츠(FI)의 회장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머스크는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잘라 말했다. 엘리트 투자자들이 머스크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이제는 개미들의 뜻에 달렸다. 이들은 셈에 능하지만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이 등을 돌리는 순간 영웅들이 몰락했다. 추락한 영웅은 머스크의 전기차 못지않은 혁신에 성공했지만, 오만이 낳은 역풍을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