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대통령은 ‘검사 윤석열’을 빨리 잊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필자의 오랜 벗은 “수사에 몰두하던 검사 시절에는 길을 걷다 마주오는 멀쩡한 사람을 보고도 ‘어떻게 추궁하면 구속시킬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어”라고 고백했다. 검사에게는 이렇게 유죄와 무죄, 옳고 그름을 구분하려는 강박이 있다. 범부(凡夫)의 평화로운 일상을 수호하기 위해 긴장하는 칼잡이의 정의감은 일단 경외(敬畏)의 대상이다.

어두운 측면도 있다. 특별조사실의 육중한 철문이 “쾅” 닫히는 순간 감금됐음을 실감하는 피의자는 공포에 거의 혼절한다. 겁주기와 회유를 포함한 다양한 신문 기술이 동원되면 무력한 피의자는 체념 상태가 된다. 그래서 어떤 검사들은 천하의 누구라도 정죄(定罪)할 수 있다는 오만을 드러낸다. 이제 변호사가 된 벗은 다행히 친정의 악습을 개탄하고 피의자의 인권과 안위를 걱정하는 착한 친구로 돌아왔다.

악당 때려잡는 정의의 사도 아닌
국민 아픔 헤아리는 공복이 돼야
내 편 아닌 변양균 영입 좋은 신호
윤 대통령 날개 활짝 펼 날 올 것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아직도 검사의 체취가 남아 있다. 그래서 “참모 뒤에 숨지 않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도어스테핑(즉석 기자회견) 과정에서 문제가 빈발한다. 정제되지 않은 검사의 언사가 튀어나온다. 이해는 간다. 그는 ‘문재인 정권의 부당한 압력에 맞선 강단 있는 검사’라는 이유로 보수의 선택을 받아 1년 만에 대통령이 됐다. 체질화된 태도와 언행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다.

문제는 이 때문에 승자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취임 두 달 만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야당에선 탄핵까지 거론하고 있다. 대통령이 검사 특유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 황당한 위기를 자초했다. 전직 검찰총장은 “자나깨나 유·무죄만 생각하는 검사들은 옳고 그름을 넘어선 고차원의 복잡한 세계와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검사의 세계관은 모순적인 대립구도에서 어떻게든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야 하는 현실 정치와 국정 운영에는 부적합하다는 진단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본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검사와 수사관들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정반대로 장·차관급과 대통령실 등 권력의 핵심 포스트에 검찰 심복들을 직행시켰다. 이 정권의 인사·정보·금융까지 ‘검찰 가족’의 수중에 넘어갔다. 새 정부는 미래를 열어야 하는데 과거를 들춰내는 DNA를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비판 여론이 일자 “과거에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하지 않았나”라고 면박을 주었다. 공복(公僕)이 주인에게 오기를 부려도 되는 것일까.

윤 대통령은 ‘단군 이래 가장 성공한 검사’였다. 두 명의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 문재인 정권 실세의 배우자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죽은 권력, 산 권력을 가리지 않고 큰 주먹 한 방으로 때려눕혔다. 시퍼렇게 눈을 부릅뜬 권력에 맞서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포효했다. 최고의 검사였고 난세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악당을 때려잡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몸을 낮추고 두려운 심정으로 헌신해야 하는 제1의 공복이다. 고물가·고금리의 쓰나미에 망연자실한 서민들을 살려내야 한다. ‘검사 윤석열’의 성공 신화는 깨끗이 잊어야 한다.

야당과의 관계도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 부패·적폐 수사는 당연하지만 기획사정(司正)은 금물이다. 정권을 빼앗긴 박탈감에 사로잡혀 있는 집단과 싸우기보다는 당면한 민생 위기를 타개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과반 의석을 가진 야당과의 협치는 필수다. 야당 의원들과 수시로 만나 흉금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해야 한다. 야당에선 “우리는 일은 잘 못하지만 싸움 하나는 잘한다”는 말이 나온다. 공멸의 위기 속에서 내부 전쟁을 벌이면 민생은 파탄나고 국민은 불행해진다.

다행히 윤 대통령은 달라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경제정책의 설계자인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을 경제고문으로 영입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내편 네편을 가리지 않고 지혜를 구하겠다는 신호다. 그가 주창하는 규제개혁과 슘페터식 경제혁신은 윤 정부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이 사심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인 김건희 여사의 자제 모드도 좋은 일이다.

이제 내 말 잘 듣는 검사·수사관 출신, 권력 다툼에 정신이 팔린 윤핵관에게 의존하는 국정 운영 기조가 확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용산 대통령실이 ‘용궁(龍宮)’으로 조롱당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오만해 보이는 대통령의 언행도 아주 선의로 해석한다면 솔직하고 직선적인 소통 방식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검사 시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원칙론자였다. 그래서 대기업 임원이 “믿을 수 있는 윤석열 검사에게 수사받게 해 달라”며 총수 비리를 제보한 일도 있었다. ‘윤 검사’는 기대대로 총수를 구속시켰다. 윤 대통령이 자신의 투박한 스타일을 쉽게 바꾸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성공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과 국민은 충분한 연애 과정 없이 결혼한 부부로 비유할 수 있다. 신혼 기간인 지금 제대로 사귀면서 서로에게 적응하는 중이다. 국민은 초보 대통령의 특수한 사정을 이해하고 그가 날개를 활짝 펼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윤 대통령도 걸림돌이 된 ‘검사 윤석열’을 빨리 잊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