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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국가 연구개발 전략 수립때 대기업 CTO 참여시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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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새 정부, 누가 과학기술을 이끄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컨트롤타워가 없다’. 정부에 쓴소리를 할 때 즐겨 사용하는 일종의 클리셰(cliche)다. 정책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거나 각 부처가 따로 놀 때, 책임지는 핵심 담당자가 보이지 않을 때 쓴다. 지금 과학기술혁신정책이 딱 그렇다. 오늘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77일째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부터 치면 130일째다. 과학기술정책 최고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아직 새 정부 1기 위원회를 구성하지 못했다.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과기정책의 연속성을 위해 전 정부 위원들을 눌러 앉힌 게 아니다. 대통령 선거일 이후 단 한 차례의 회의도 열리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다. 축소된 대통령실에는 과학기술계가 희망하던 과학기술수석 신설은커녕 과학기술보좌관이 폐지되고 과학기술비서관 한 명만 남았다. 에너지 전문가로서 원자력 부흥의 미션을 수행할 과기비서관을 보완할 것으로 보이던 과학기술특별보좌관은 개인사정으로 사퇴했고 특보실 추진 자체가 흐지부지되는 형국이다. 국정과제 필두에 등장한 ‘임무지향적 과학기술 체계’가 무엇인지 일치된 인식이 없어 제각각의 해석이 나오고 있다. 컨트롤타워가 없는 게 맞다.

과기 보좌관 폐지, 컨트롤타워 실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개점휴업
민간 주도의 합동위 신설 서두르고
‘대기업 배제’ 암묵적 원칙 탈피해야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2월 서울 역삼동 한국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꿉니다’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과학기술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2월 서울 역삼동 한국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꿉니다’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과학기술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필자는 정부에 컨트롤타워를 주문하지 않는다. 컨트롤타워는 개발시대, 정부 주도 시스템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받치는 컨셉에는 걸맞지 않다. 이번 정부의 이념적 특징 중에 자유주의·시장주의, 그리고 전문가주의가 있다. 과학기술혁신은 민간이 주도한다는 인식은 매우 옳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업무보고를 받고 “연구개발 투자는 민간 기업과 영리적 투자로는 할 수 없는 전략적 도전 기술과 파급 효과가 큰 원천기술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업무보고 내용을 되받아 당부한 것이지만 의미가 있다. 관료들에게 이 문장을 요약하라고 하면 아마 “전략기술·원천기술 개발”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발언의 포인트는 “민간 기업이 (당장 돈이 안 되어) 할 수 없는”에 있다. 정부의 역할을 규정한 것이고 과학기술 민관 협력의 방향을 말한 것이다. 정부가 생각하는 민관 협력은 여전히 관 주도의 활동에 민간을 함께 참여시키는 식이다. 정부가 지정한 전략기술 분야에 민간 투자를 유도하고 인력양성 사업에 수요기업을 매칭하는 것 같은 접근이 대표적이다. 민관 협력이 아니라 민간 동원이다.

정부는 과학기술 혁신을 여전히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물론 1980년대 국책연구사업을 시작한 것, 김대중 정부 시절 연구개발 투자를 크게 늘리고 정보통신기술 벤처 붐을 일으킨 것, 노무현 정부 시절 선진국형 국가혁신체계 구축에 나선 것 등 그간 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을 폄하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근래 한국의 국가기술혁신시스템은 이미 민간이 주도한다. 우리나라 전체 연구개발 투자에서 정부와 민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25 대 75인데,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해 민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이 가장 크다. 주기적으로 각국의 혁신시스템을 평가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유럽연합의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특징으로 민간의 혁신 활동과 성과가 우수한 것을 들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 통신사 블룸버그의 혁신지수에서 한국이 세계 1위를 도맡고 있는데, 이 지수를 구성하는 지표들은 민간의 혁신 활동에 대한 것들이 많다. 혹자는 ‘삼성 착시현상’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삼성이 한국 기업이고 국내에서 혁신 활동을 펼치는 이상 삼성을 빼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제대로 된 민관 협력, 즉 민-관 간에 협력적 분업을 수행하려면 민간 기업이 할 수 없지만 미래를 위해 정부가 할 일이 뭔지 알아야 한다. 정부·국책연구소·대학에 있는 똑똑한 사람들에게 맡기면 답이 나올까.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선진국들의 발자국이 모범답안이므로 정보를 습득해 정답이 보이는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 필요했다. 한국이 아직 추격중인 바이오·양자과학기술·항공우주·재생에너지 등의 분야에서는 이런 공식이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전략기술로 부상한 반도체, 세계를 선도하는 2차전지와 전동화자동차, 전통산업이지만 경쟁력을 유지해야 할 조선·가전·화학 같은 산업에서는 한국보다 앞에 있는 나라가 드물어 답해야 할 질문도 스스로 내야 한다. 이런 질문들을 가장 치열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부도, 연구소도, 대학도 아닌 해당 분야의 첨단에서 경쟁하는 민간 기업에 있다. 정부가 무엇을 할지 민간 기업에 물어야 한다.

물론 올해 약 30조원인 정부 연구개발 지출 전체 방향을 기업에 물어볼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대학이 담당하는 기초연구는 연구자 자율에 맡겨 상향식 제안과 그랜트(grant) 방식의 지원을 유지해야 한다. 문제가 보이지 않을 때 돌파구를 제시하는 것도 기초연구다. 기초연구 확대 기조는 전 정부에 이어 계속 가져가는 게 옳다. 기초연구는 연구인력 양성 역할도 크다. 지난 30여년간 반도체학과 없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산업을 일군 것은 물리학·화학·전자공학·재료공학에서 기초 역량을 닦은 인재들이었다. 대학 연구를 묶음 예산 방식으로 지원해야 한다. 대학에 대한 간섭을 줄이려는 현 정부의 기조와도 맞는다.

민간 기업에 문제를 묻고 의사결정에 기업들을 참여시켜야 하는 것은 대통령이 말한 대로 전략기술과 원천기술 분야다. 정부는 연구개발의 불확실성이라는 리스크를 기업으로부터 덜어주고 나눠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상용화까지 아직 여러 단계가 남아 있는 기술, 한 기업의 결심을 뛰어넘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기술, 공익이 크지만 민간 기업에 큰 이윤이 남지 않는 기술, 국제 관계나 국가 정책, 혹은 사회적 수용성에 따라 명운이 좌우되는 기술 등에서 특히 불확실성이 크다. 미국·독일·영국 등 선진 주요국에서는 민간 기업의 최고기술경영자(CTO)가 정부의 연구개발 전략 수립에 참여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인공지능 전략은 구글에, 메타버스 전략은 페이스북에 묻는 식이다.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4차산업혁명’론의 원조는 독일 정부의 산업 4.0(Industrie 4.0) 전략인데, 이것은 지멘스의 스마트제조 전략이 확장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며칠 전 폐지가 확정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간 주도 민관 협력을 위한 추진기구로 ‘민관 합동위원회’를 두겠다고 공언했고, 이중 과학기술혁신 분야의 민관 위원회가 가장 먼저 생길 것으로 예측되었었다. 하지만 민관 위원회는 소식이 없고, 앞서 말한 대로 법정 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조차 구성되지 않은 상태다. 과학기술혁신 민관 위원회를 속히 신설해야 한다. 과학기술특보 또는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간사를 맡고, 관계부처 장관들이 당연직으로 참여해야 한다. 민간 위원으로는 과학기술자와 중소기업 대표뿐 아니라 주요 대기업 CTO들이 망라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 대기업은 정책의 참여자여서도 안 되고, 정책의 대상이어서도 안 된다는 암묵적 배제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을 진보 정권이 앞장서 깼다면 좋았을 것이다. 한국 대기업은 정부에 불려 나오면 투자나 채용 계획을 선물로 내놓고 과도한 규제와 총수의 사법처리 면하기에 급급하다. 일부 후진국에서처럼 대기업이 천연자원을 내다 팔고 국민의 고혈을 쥐어짜 연명한다면 그게 정상일 것이다. 첨단기술과 혁신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대기업이라면 적어도 과학기술혁신 분야에서는 동반자로 취급해도 되지 않을까.

민관 위원회 신설과 더불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제자리 찾기도 필요하다. 신설 민관 위원회를 기업과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해 전략기술과 원천기술 이슈를 주로 다룬다면, 과기자문회의는 과학기술 제분야 연구자들로 구성해 좀 더 미래적인 주제와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다루고 과학기술뿐 아니라 보건·환경·국방 등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토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정책에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는 오해가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보수 정부에서는 기관장과 원로급 과학기술인들이 위원회를 채운다. 진보 정부에서는 현장 소장파와 각급 대표들로 위원회가 구성된다. 윤석열 정부 1기 과기자문위원회는 민간 주도라는 지향이 반영되기를 기대한다. 운영 지원에 그치고 있는 지원단 조직도 상설 전략기구로서 역할할 수 있도록 전문성을 강화하고, 자문의제가 정책화되어 집행되고 정책효과를 냈는지 모니터링하는 기능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실의 과학기술혁신 기능이 축소된 것을 과기자문회의 정상화를 통해 시스템적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