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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깻잎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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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전영선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영선 K엔터팀 팀장

전영선 K엔터팀 팀장

이 논쟁은 아직 진화 중이다. 기원은 지난 2019년 8월 가수 노사연·이무송 부부가 출연한 예능프로그램(SBS ‘집사부일체’)에서 털어놓은 에피소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이 한 여자 후배와 식사를 하던 중 반찬으로 나온 깻잎 장아찌가 문제였다. 후배가 깻잎을 떼어내지 못하자 이무송이 젓가락으로 꼭지를 살짝 눌러 도와주게 된다. 이를 본 노사연은 ‘외간 여자의 깻잎을 잡아준다’고 화를 냈고 이무송은 ‘매너였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 부부싸움은 지난 겨울 갑자기 알고리즘의 알 수 없는 장난을 통해 각 커뮤니티 게시판을 장악했다. 모임이나 술자리 주제가 된 데 이어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로 등판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동일 논쟁은 종목을 바꿔가며 이어지고 있다. 애인 친구에게 새우를 까줘도 된다 안된다를 따지는 ‘새우장 논쟁’, 추운 날 애인 친구가 롱 패딩 지퍼를 올리지 못할 때 처신을 묻는 ‘패딩 논쟁’, 친구가 내 연인의 자동차 블루투스를 연결해 음악을 틀어도 되는가를 정해야 하는 ‘블루투스 논쟁’. 아마 이 순간에도 새 버전이 추가되고 있을 것이다. 유행 사이클이 주 단위로 바뀌는 요즘, 유독 이 논제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장의 재미는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하는 데서 나온다. 해법이 기발할 때는 기꺼이 설득되기도 한다. 어떤 답변을 내는지를 보면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과거와 달리 출신 학교나 고향, 가족 관계 등 신상정보를 물어보는 것이 절대 금기인 만큼, MBTI(마이어스 브릭스 유형지표)와 함께 초면의 어색함을 깨는 수단으로도 자주 쓰인다. ‘라떼’는 회식 자리에서 처음 보는 선배가 ‘아버지 뭐하시는지’를 묻기도 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매장 감이다.

또 하나. 대한민국에서 절교로 이어질 위험이 없는 거의 유일한 논쟁 주제다. 요즘은 어떤 자리에서 정치나 사회 이슈에 대한 ‘진짜 논쟁’을 꺼내려면 파국을 각오해야 한다. 격정적인 정치 환경을 경험한 지난 몇 년 간 누구에게나 깨진 단톡방 한두 개 쯤은 생겼다. 결국은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만나 떠들며 기존 생각을 강화하고, 사회는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다. 깻잎 논쟁 정도의 유연성만 있어도 훨씬 소통이 편할텐데, 현재로써 이는 욕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