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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2개 당근, 등굽은 오이…몸값 저렴한 못난이들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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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정은영(35)씨의 냉장고에는 지난달부터 뿌리가 두 개인 당근, 흠집이 난 감자, 굽은 오이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대형마트를 통해 구매한 ‘못난이 농산물’이다. 못난이 농산물은 품질에는 문제는 없으나 외관이 울퉁불퉁하거나 흠이 있어 상품 가치가 없는 농산물들을 일컫는다. 정씨는 “일반 상품보다 조금 작거나 흠이 있는 거 빼고는 큰 차이가 없어 자주 사 먹고 있다”고 말했다.

날로 치솟는 밥상 물가에 못난이 농산물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못난이 농산물은 상품성이 떨어져 가공이 가능한 경우 즙 등으로 활용되긴 했지만, 대개는 폐기 수순을 밟는 처치 곤란한 존재였다. 그러나 고물가 시대에 접어들면서 시중보다 20~50% 저렴한 가격의 못난이 농산물이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소비자의 관심을 받는 것이다.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 농산물'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장여주(38)씨가 쓰고 있는 못난이 농산물 구독 서비스의 농산물들. [사진 독자 제공]

고물가 시대에 '못난이 농산물'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장여주(38)씨가 쓰고 있는 못난이 농산물 구독 서비스의 농산물들. [사진 독자 제공]

‘금값’된 농산물…집밥 차리기도 힘들어 

최근 물가가 전방위적으로 오르며 채소 가격도 치솟고 있다. 사진은 지난 17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채소 판매대. 연합뉴스.

최근 물가가 전방위적으로 오르며 채소 가격도 치솟고 있다. 사진은 지난 17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채소 판매대. 연합뉴스.

 못난이 농산물의 인기는 '금값'이 된 농산물 가격 상승과 맞닿아 있다. 봄 가뭄에 이은 여름 장마의 영향으로 농산물 수급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주부 박모(37)씨는 “1년 전만 해도 4인 가족 식비에 70만원 정도면 충분했는데 지금은 물가가 너무 올라서 똑같이 장을 보면 10만원 가까이 더 든다”며 “수박 하나 사 먹기도 무서운 정도”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집밥의 주재료인 채소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지난 22일 기준 적상추 100g 소매가격은 2087원으로 한 달 전(998원)에 비해 급등했다. 시금치 1kg 소매가격은 2만 4237원으로 한 달 전 가격인 9578원보다 2.5배가량 뛰었다. 오이 10개의 소매가격은 1만 7331원으로 역시 한 달 전(9588원)보다 크게 올랐다.

 유통가에서도 흠집이 있거나 사이즈가 작은 과일이나 채소 판매에 적극적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고물가 시대를 맞아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못난이 농산물을 찾는 소비자가 크게 늘고 있다"며 "지난 1~6월 ‘B+급 과일’의 누계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50% 늘었다" 말했다.

정기구독으로 구하기 쉬워져

정기구독 서비스를 통해 못난이 농산물을 구하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 상품가치가 없다고 버려지는 농산물을 구할 수 있다는 점, 플라스틱 박스를 쓰지 않고 신문지와 생분해 비닐을 사용한다는 점 등이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소비자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가격도 시중 유기농 제품보다 10~40% 저렴하다.

지난 3월부터 농산물 구독 서비스를 쓰고 있는 고지연(28)씨는 “비건을 시작하면서 ‘제로웨이스트’(쓰레기 배출 최소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못생겨서 버려지는 농산물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버려지는 못난이 농산물을 팔고 있는 서비스를 쓰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세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주부 장여주(38)씨는 “시중보다 30% 정도 저렴한 가격으로 채소들을 구매할 수 있어 살림에 도움이 된다”며 “품질이 너무 좋은데도 판로를 구하지 못한 농가를 도울 수 있다는 점도 기분 좋게 구매를 하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물가 안정 차원에서 못난이 농산물의 유통은 긍정적이다”며 “다만 기존 상품과 못난이 농산물이 유통 과정에서 섞이지 않도록 정부의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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