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한국인 앞니 뒷면을 보면 테두리가 뚜렷하고 안쪽이 움푹 파인 형태입니다. 삽처럼 생겼다고 해서 ‘삽 모양 앞니(shovel-shaped incisor)’라고 부르죠. 보통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인에게서 보입니다.
보통 아시아인에게 두드러지는 앞니 모양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알래스카의 이누이트족, 알류산열도의 알류트족, 헝가리인에게도 나타난다. 유럽이나 아프리카 계열 사람에겐 거의 없는 특징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삽 모양 앞니(오른쪽)에선 앞니의 윗부분이 입술 쪽으로 볼록한 형태(Labial Convexity)를 이루고 테두리가 뚜렷한 능선 모양을 띠며(Margianal Ridges) 아래 쪽에 작은 혹(Tubercle)이 나타난다. 이런 형태의 앞니는 뭔가를 물거나 뜯을 때 더 강한 힘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사진 Lauren C. Denton
문제는 이게 초기 호모 사피엔스 화석에는 없고, 더 과거의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에게 있는 특징이라는 점입니다. 1921년 중국 베이징에서 발굴된 ‘베이징인’ 앞니에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베이징인은 한때 교과서에선 베이징원인으로 불렸던 호모 에렉투스입니다. 호모 에렉투스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초기 인류로 약 200만년 전에 출현했습니다. 약 30만년 전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보다 170만년쯤 선배인 셈이죠.
그러면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는 의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건 심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모두 30만년 전 출현한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인 줄만 알았죠. 하지만 최근 20년간 발견은 인류 족보를 종잡을 수 없게 헝클어 버렸습니다.
인류 족보를 꼬아버린 ‘인류의 요람’ 연대 측정
최근 미국 남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이 기존 예측보다 100만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테르크폰테인 동굴은 세계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이 가장 많이 발굴돼 ‘인류의 요람’이라고 불리죠. 동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와 함께 인류의 뿌리를 찾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지역입니다.
‘인류의 요람’으로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테르크폰테인 동굴 지역.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연구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남아공 소재 대학교에서 이곳 발굴 결과를 토대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연구 결과를 거의 매년 쏟아낸다. 사진 AFP=연합뉴스
그동안 남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동아프리카에서 나타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후손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약 400만년 전 출현해 300만 년 전까지 활동했지만, 남아프리카에선 약 280만년 전 출현한 것으로 알려졌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연대 측정에서 남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약 360만 년 전에도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후손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다는 말이죠. 이 연구는 지난달 27일 권위 있는 과학 저널인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실려 세계 고고학계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인류 족보를 꼬아버리는 발견과 발굴이 최근 20년간 한 달이 멀다 하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발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죠. 20년 전엔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 종이라는 믿음이 견고했지만, 지금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게 사실 ‘상상의 종’이 아니냐는 말도 나옵니다.
사기에 가까운 그림 ‘진보의 행진’
아마 인류 기원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그림은 ‘진보의 행진(The March of Progress)’일 겁니다. 이 그림은 침팬지 조상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진화했고,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을 거쳐 호모 사피엔스가 됐다는 걸 암시합니다. 마치 게임의 주인공이 레벨업하면서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죠.
1965년 자연과학을 다룬 도서 시리즈에 실린 ‘진보의 행진’. 당시 원제는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는 여정(The Road to Homo Sapiens)’였다. 수많은 패러디가 나왔고 광고에도 등장면서 인류의 역사와 관련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됐다. 하지만 이 그림은 대중에게 인류의 기원에 대해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줬다. 사진 Life Nature Library
하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볼 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인류 진화가 직선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인류에 속하는 무수한 종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른 종이 이전의 종과 섞였습니다. 강줄기가 갈라졌다가 합쳐지고 어떤 지류가 더 큰 물줄기로 성장하지만 다른 것들은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고인류학자들이 ‘진보의 행진’이 오류에 가깝기 때문에 당장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 관장은 “이 그림은 인류가 자기보다 먼저 있던 존재를 밟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식으로 진화했다는 착시를 준다. 진화는 진보의 스텝을 밟아나간 과정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2000년대에 막 접어들 무렵까지 고인류학계의 주류 이론은 아프리카 기원설(Out of Africa Hypothesis)이었습니다. 초기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 뿐만 아니라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가설이죠.
아프리카 기원설에 따르면, 호모 에렉투스는 약 180만년 전 아프리카 대륙을 탈출합니다. 다른 대륙에 진출한 호모 에렉투스는 유럽 근방에서 하이델베르크인으로 진화합니다. 하이델베르크인은 다시 유럽에선 네안데르탈인으로, 아프리카로 돌아온 뒤 다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약 2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는 약 6만년 전 사냥감을 찾아 다른 대륙으로 떠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 진출한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대륙에 존재하던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과의 생존 경쟁에서 이기거나 혹은 폭력적으로 말살해 지구의 지배자가 됐다는 거죠.
그래서 아프리카는 인류의 씨앗을 낳은 어머니의 땅처럼 여겨졌습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인류 아종과 섞이지 않은 순혈이라고 생각했죠.
‘순혈’이 아닌 ‘잡종’ 호모 사피엔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놀라운 증거가 쏟아져 나옵니다. DNA 분석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고대 인류의 뼈를 분석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2010년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네안데르탈인의 DNA와 유럽인의 DNA를 비교한 결과 현재 유럽인의 약 4%가 네안데르탈인과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즉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현생 인류에 흐르고 있다는 거죠. 2020년엔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도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공유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나옵니다. 현생 인류가 ‘순혈’이 아니라 네안데르탈과 교배한 결과라는 겁니다.
2019년 9월 이스라엘 헤브루대학에서 공개한 데니소바인 여성의 모습. 데니소바인의 해부학적 구조를 토대로 만들어낸 최초의 3D 형상이다. 2008년 발견된 작은 손가락뼈에서 DNA를 뽑아냈고, 이와 유사한 인류의 모습과 비교해 만든 형상이다. 데니소바인은 매우 추운 지역에서 살았으며,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도 관계를 맺고 자손을 낳았다. 티벳인, 네팔인 등 매우 높은 고도에 쉽게 적응하는 특성이 데니소바인의 DNA에서 왔다고 추정된다. 사진 UPI=연합뉴스
2008년 러시아 시베리아의 한 동굴에선 호모 사피엔스도, 네안데르탈인도 아닌 데니소바인이라는 인류가 불과 4만년 전에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네안데르탈인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와 동시대를 살면서 함께 자식을 낳고 기르기도 했습니다. 데니소바인의 DNA는 현재의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서 발견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동아프리카에서 세계로 뻗어 나갔다는 아프리카 기원설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2017년 모로코 제벨 이르후드 지역에서 31만 5000년 전에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발견됐죠. 동아프리카에서 20만 년 전 출현했다는 기존 이론의 토대가 무너진 겁니다.
이스라엘에선 18만년 전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의 턱뼈 화석이 발견되고 했습니다. 그전까지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로 퍼져나간 게 6만년 전쯤으로 봤는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된 거죠. 현재 초기 호모 사피엔스 화석이 발굴되는 지역은 아프리카에서 점점 다른 지역으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점점 신뢰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죠.
우리는 호모 에렉투스인가
최근엔 현생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 걸쳐 살던 호모 에렉투스가 각자 진화하면서 뒤섞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가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아프리카기원설에 맞서 이 가설을 ‘다지역 기원설(Multiregional Evolution Hypothesis)’이라고 합니다.
2005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조지아에서 발견된 것이 이런 가설의 신빙성을 높였습니다. 드마니시인이라고 불리는 이 호모 에렉투스는 18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죠.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가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다른 지역에도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났다는 증거가 발견된 겁니다.
이후 세계 전역에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면서 호모 에렉투스가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는 이 가설을 지지하는 과학자가 늘고 있죠. 이한용 관장은 “180만년, 200만년 이상된 호모 에렉투스 혹은 그 이전 인류가 아시아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다”며 “아프리카에서 진화를 시작한 인류가 아시아로 언제 퍼져나간 것인지 그 시점에 대한 의문이 계속 생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003년엔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한 특이한 인류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보다 더 이전인 초기 인류의 특징을 가졌지만, 활동한 시기는 약 9만년 전에서 1만년 전으로 비교적 최근이었습니다. 201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류의 요람’에선 호모 날레디가 발견됐는데 이 역시 초기 인류의 특징을 갖고 있지만, 30만~20만년 전에 살았습니다. 초기 인류의 특징을 가진 인류가 최근까지 살았다는 증거가 지구 전역에서 발견되면서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인류가 진화했다는 가설에 설득력이 더해졌죠.
인도네시아에서 발굴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의 화석. 키가 100㎝쯤 돼서 ‘호빗’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중요한 발굴이 이어지면서 인류 기원에 대한 기존 가설들이 흔들리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만약 다지역 기원설이 맞는다면, 현생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 종이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라는 단일 종으로 묶어야 이치에 합당할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공통 조상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에 출현한 호모 에렉투스일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면 동아시아인이 삽모양앞니를 가진 게 설명이 됩니다.
다시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아시아 기원설
베이징인이 발견된 1920년대에 몇몇 학자들이 아시아 기원설(Out of Asia Hypothesis)을 주장했습니다.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세계로 퍼졌고 진화를 통해 현생 인류가 됐다는 이론입니다.
드마니시인과 인도네시아 섬에서 다른 인류 종이 발견된 이후 아시아 기원설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조지아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인 드마니시인이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진출하던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는 거죠.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로 돌아가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고, 유럽으로 건너가 네안데르탈인으로 진화했으며, 아시아 근방에선 데니소바인으로 진화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인류 공통의 조상은 호모 사피엔스라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주류 이론이다. 하지만 지구 전역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우리의 공통 조상이 호모 에렉투스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많아지고 있다.
아시아 기원설은 아직 소수 견해입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오랜 기간 여러 DNA 추적 조사와 발굴 기록으로 뒷받침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추세를 보면 더 다양한 인류 종이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들어 중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의 발굴도 만만찮죠. 그러니 아프리카 기원설이 주류의 입지를 계속 유지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이한용 관장은 “아시아 지역에도 자본이 투입되면서 발굴량이 크게 늘었다”면서 “20세기 유럽 학자들이 만든 아프리카 기원설이 앞으로 나타날 아시아의 발굴 기록에 의해 지속적으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