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14년간 낮은 일 관동군, 밤은 ‘아마카스 천하’

중앙선데이

입력 2022.07.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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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6〉

출고를 앞둔 만주국 국기. [사진 김명호]

출고를 앞둔 만주국 국기. [사진 김명호]

텐진(天津)에 있는 푸이(溥儀·부의)를 동북(만주)으로 빼돌리기 위한 관동군의 계략은 치밀했다. 실직한 전 베이징 경찰국장에게 돈뭉치를 안겨줬다. “일본 조계(租界)에서 대형 소란을 일으켜라.” 1931년 11월 8일 밤, 중국 보안대 2000여 명이 일본군 무기고를 습격했다. 일본 주둔군은 일본 조계에 계엄을 선포하고 외부와 교통을 단절시켰다. 일본군 사령관이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 보안대의 유탄에 일본 군인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보안대가 일본 조계에서 300m 밖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 당국은 오해 없기 바란다.”

“짐칸에 탄 차, 전신주 받아 머리 깨지는 줄”

관동군이 동북을 점령한 후 대도시에 가족을 동반한 일본 관광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3년 봄, 펑톈(奉天). [사진 김명호]

관동군이 동북을 점령한 후 대도시에 가족을 동반한 일본 관광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3년 봄, 펑톈(奉天). [사진 김명호]

훗날 푸이는 회고록에서 톈진사변을 회상했다. “관동군 특무부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연출한 걸작이었다. 11월 10일 밤, 차량 통행이 금지된 거리를 낯선 기사가 운전하는 낡은 승용차의 짐칸에 몸을 숨겼다. 중도에 전신주를 들이받아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일본요리 집에 도착한 푸이는 일본군 장교로 둔갑했다. 대위 복장에 군모까지 쓰고 승용차에 올랐다. 일본 특무들이 탑승한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선착장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정샤오쉬(鄭孝胥·정효서) 부자를 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12일 새벽, 톈진 주재 일본 총영사가 도쿄 외무성에 전문을 보냈다. “간편한 복장의 승객 수명과 일본군인 5명이 탑승한 소형 선박이 영국 조계의 부두를 출발했다. 폐제(廢帝) 선통(宣統)이 배 안에 있다는 소문은 추측에 불과하다.”

아마카스는 전역한 후에도 군복 착용을 즐겼다. [사진 김명호]

아마카스는 전역한 후에도 군복 착용을 즐겼다. [사진 김명호]

13일 새벽, 푸이가 탄 선박이 랴오닝(遼寧)성 잉커우(營口)의 남만주철도(만철) 부두에 닻을 내렸다. 푸이의 회고를 소개한다. “동북의 첫발을 선양(瀋陽)이 아닌 잉커우에 디딘 것은 의외였다. 마중 나온 사람은 일본인 몇 명이 고작이었다. 톈진시절 통역이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를 소개했다. 당시 나는 아마카스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다.”

아마카스는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교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헌병 병과였던 도조는 아마카스도 같은 길 가기를 원했다. 어릴 때부터 말을 좋아하던 아마카스는 도조의 기대를 저버렸다. 기병과를 택했다. 이 총명한 기병장교는 자신도 모르는 약점이 있었다. 말을 좋아만 했지 다룰 줄은 몰랐다. 훈련 중 낙마로 왼쪽 다리가 망가졌다. 도조는 한번 정을 준 사람을 버리는 법이 없었다. 아마카스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불구가 됐다고 실망하지 마라. 기병이나 보병은 불가능해도 헌병은 상관없다.”

관동지진 때 아마카스 잔혹함에 열도 들썩

만주국의 초기 연호는 다퉁(大同)이었다. 수도 신징(新京)의 다퉁광장. [사진 김명호]

만주국의 초기 연호는 다퉁(大同)이었다. 수도 신징(新京)의 다퉁광장. [사진 김명호]

1923년 9월 일본 관동지방에 대형지진이 발생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 흉악한 소문이 나돌았다. 헌병대위 아마카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이 도를 넘었다고 단정했다. 온종일 팔굽혀펴기로 몸을 풀었다. 해 질 무렵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 오스키사카에(大衫榮)의 집으로 갔다. 오스키의 목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졸랐다. 함께 있던 오스키의 정부 이토 노에(伊藤野枝)와 이토의 어린 조카도 봐주지 않았다. 시신들은 우물에 던져버렸다. 소란이 진정되자 아마카스의 잔혹함에 일본 전역이 떠들썩했다. 일본 정부는아마카스를 재판에 회부했다.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하자 군부가 술렁거렸다. “아마카스는 충군(忠君)과 애국(愛國)의 상징이다. 천하디 천한, 권력의 개들이 인간이 되려고 기를 쓴다”며 구명운동에 열을 올렸다. 법원이 10년 형을 선고하자 군인들이 뒷구멍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복역 2년10개월 만에 보석으로 출소했다.

도조는 아마카스를 프랑스로 보냈다. “하고 싶은 공부 하며 자신을 세상의 이목과 차단해라.”

3년에 걸친 아마카스의 유학생활은 흔히 말하는 유학(留學)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과는 담을 쌓았다. 낮에는 거리의 화가들과 어울리고 해가 지면 연주회에서 시간을 보낸, 유학(遊學)으로 일관했다. 전통을 자랑하는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후에는 흑백영화에 매력을 느꼈다. 영화가 선전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귀국을 서둘렀다.

일본으로 돌아온 아마카스는 만주로 갔다. 가명으로 선양의 일본 헌병대 군속 숙소에 짐을 풀었다. 사관학교 동기생이 구술을 남겼다. “아마카스는 매일 동분서주했다. 앉은 자리가 더워질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마치 한 국가를 태동시키기 위해 기를 쓰는 사람 같았다. 만주국 수립 후 전면에 나선 것을 보고 내 추측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말이다. 만주국 14년간 만주의 낮은 관동군이 지배하고 밤은 아마카스의 천하였다.

동북의 낯선 부두에서 만난 아마카스의 첫인상은 푸이의 호감을 사고도 남았다. 공포의 대상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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