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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병 의심 노동자들의 “내 몸이 증거” 외침에 응답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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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호 27면

이현석의 ‘소설의 곁’

이현석 칼럼

이현석 칼럼

임솔아의 단편 ‘초파리 돌보기’(『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문학과 지성사, 2021)는 “이원영은 초파리를 좋아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원영은 누구이기에 초파리를 좋아하기까지 했을까. 그는 1978년 가발공장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이래 외판원, 마트 캐셔, 급식실 조리원, 볼펜 부품 조립 노동자, 텔레마케터 등을 거쳤다. 원영의 약사(略史)는 여성 노동의 연대기 자체다. 그 끝자락에 원영이 정착한 일터는 대전 대덕단지 내 한 실험동. 원영은 그곳에서 2013년까지 실험용 초파리를 기르다 퇴직했다. 초파리 양육은 원영이 거쳤던 어떤 직업보다 보수가 높았다. 실험체가 원활히 생육하도록 온·습도가 쾌적하게 유지되는 곳에서 원영은 가운을 입고 멸균 처리된 현미경과 시험관과 붓을 이용해 성심껏 일했다. 그렇게 원영이 키운 초파리는 국내는 물론 하버드대나 예일대처럼 세계 곳곳에 있는 산학체로 수출됐다. 원영은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고 느낄 만큼 제 노동에 자부심을 느꼈다. 일에서 얻는 보람에 상응하여 초파리에 대한 애정도 커져갔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수년이 지난 현재, 원영은 전신탈모를 겪고 있다. 연하장애도 생겨 삼킨 음식물을 자주 게워냈다. 식사량이 줄어들자 자연히 체중도 많이 빠졌다. 원영은 ‘탈모 전문’이라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깨끗했다. 소설가로 바쁘게 살고 있는 원영의 딸 지유는 이 모든 과정을 목격했다. 지유는 엄마의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는 것을 처음 본 날을 기억했다. 초파리가 예쁘다며 연구소에서 기르던 몇 마리를 몰래 집으로 가져온 날부터 원영의 탈모가 시작됐다.

‘산재다.’

초파리 돌보기

초파리 돌보기

지유는 의심한다. 엄마의 전신탈모와 연하장애가 초파리 양육시설에서 비롯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유는 소설을 쓴다는 명목 하에 원영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보호구는 똑바로 착용했는지, 환기시설은 제대로 작동했는지, 클로로프롬이나 크롬 같은 유해물질을 쓰지는 않았는지. 원영은 그런 걸 왜 묻느냐며 갸우뚱거리면서도 딸의 작품을 위해 과거 업무 환경을 기탄없이 말하지만 엄마가 진술하는 내용과 딸이 의심하는 바는 서로 어긋나 자꾸만 미끄러진다.

여기서 책을 잠시 접어둔 나는 지유가 원영과 함께 직업환경의학과 외래로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직업력 파악이다. 가발공장에서 일했던 때부터 원영의 업무내용을 순차적으로 듣고 정리해 의심증상을 일으킬 만한 업무를 선별한다. 그 다음 유해인자와 노출 수준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장에 비치해둔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와 작업환경측정 결과서를 요청할 것이다. 자료에 피부질환, 소화기 증상, 자가면역질환 등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물질이 있다면 업무관련성이 높다고 소견서를 쓰기까지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같이 일했던 동료 중에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확신을 가지고 쓰게 될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렇게 순조로운 경우는 드물다. 소설에 따르면 원영이 시행했던 자가면역질환 검사와 희귀병 검사 등에서 유의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아토피·갑상선질환·백반증·루푸스 등 전신탈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질환은 여기서 배제된다. 또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전신탈모는 모낭 속 항원을 공격하는 유전학적 요인일 가능성이 높다. 전체 유질환자의 12%가 50세 이후에 첫 증상을 보이므로 원영의 연령에서도 충분히 발생 가능하다. 지유는 전신탈모에 더해 연하장애가 나타난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연하장애는 노화에 따라 신경 및 근육 기능이 약해지면서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희박한 가능성에도 내담자가 원한다면 근로복지공단 산하 직업환경연구원에 의뢰할 수 있다. 올해 4월부터는 직업병 모니터링과 수사지원을 하는 ‘직업병 안심센터’가 지역거점병원에 설치된 덕에 정밀조사 의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런 기관에서도 인과성이나 상관성이 불분명하다고 결론난다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회부해 한두 차례 더 사실 여부를 다투어볼 수 있다. 여기서도 납득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행정소송을 하게 될 것이다.

삼성반도체 사건이나 가습기살균제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비극의 적잖은 원인인 바, 원인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려는 노력은 직업병 발굴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행정소송까지 이어질 지도 모르는 일련의 과정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결코 적은 부담이 아니다. 따라서 인과성이 없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경우라면 환자-의사간의 신뢰관계를 깨지 않는 선에서 객관적인 정보를 차분하게 제공하는 것도 전문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소설을 마저 읽어보자. 실험동에서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지유에게 원영은 “이상한 건 없었다니까”라고 말한다. 지유의 질문이 원영으로 하여금 원치 않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상 안에서 실험동은 병을 일으키는 음험한 장소로, 애정으로 양육했던 초파리는 병을 옮기는 벌레로 변해갔다. 원영은 보람으로 충만했던 일터에서의 기억을 지유가 훼손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딸에게 부탁한다. “지유야, 원영이가 깨끗이 다 나아서 건강해지는 결말을 써줘.”

원영은 피해자로서의 서사를 택하는 대신, 여성 노동자이자 돌봄 제공자로서 살아온 내력을 통해 자기 삶이 쓰이길 원했다. 이후 어떤 계기를 통과한 지유는 엄마의 바람처럼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라는 문장으로 자신이 쓰고 있던 소설을 끝맺는다. 이는 ‘초파리 돌보기’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노동의 가치가 극도로 저평가되는 시대에 노동자가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는 것만큼이나 원인 모를 질병이 일터 내의 위험에서 비롯됐다고 의심하는 일은 타당하다.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소설은 ‘시시하다’고 자평하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진동하는 현(絃)처럼 모종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것은 단지 소설이 하는 일에 불과할지 모르나, “내 몸이 증거다”라는 외침에 응답할 의무가 있는 종사자들이라면 소설의 일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현석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 장편소설 ‘덕다이브’ 등을 썼다. 2020년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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