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백자처럼 빛나는 슈트 만든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2.07.23 00:20

업데이트 2022.07.2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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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호 21면

맞춤양복점 ‘레리치’ 김대철 대표 

오는 27일부터 31일까지 남산 소월로 138번지에 위치한 맞춤양복점 ‘레리치(LERICI)’ 공방에서 ‘형태의 상승’ 전시가 열린다. 흥미롭게도 전시 대상은 ‘남성 슈트’다. 레리치 김대철 대표는 “18년간 응축한 경험을 바탕으로 슈트 껍데기 안에 숨겨진 뼈대와 속살들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이 전시가 의미 있는 것은 슈트의 본고장인 영국·이탈리아에서도 흔치 않은 기획인데다 말로만 듣던 ‘비스포크’ 스타일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간의 슈트 복식사에서 서로 다른 원단을 이어 옷을 만드는 방법은 아직까지 딱 두 가지뿐이다. 기계인 재봉틀로 박거나, 인간이 손으로 바느질을 하거나. 레리치는 ‘비스포크’ 방식으로 슈트를 만든다. 비스포크(bespoke)란 ‘맞춤제작하다’라는 뜻으로 100% 핸드메이드가 원칙이다. 한마디로 장인들이 재봉틀을 사용하지 않고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만 옷을 만드는 방법이다.

배우 손석구 “집요한 디테일에 위로받아”

‘레리치’ 김대철 대표와 시침질을 마친 슈트 재킷. ‘시침질’은 본격 바느질 전 두 장의 옷감과 심지가 서로 밀리지 않도록 꿰매두는 임시 방편이다. 재킷이 완성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작업이지만 장인들은 시침질 한 땀 한 땀에도 노력과 정성을 다한다. 최영재 기자

‘레리치’ 김대철 대표와 시침질을 마친 슈트 재킷. ‘시침질’은 본격 바느질 전 두 장의 옷감과 심지가 서로 밀리지 않도록 꿰매두는 임시 방편이다. 재킷이 완성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작업이지만 장인들은 시침질 한 땀 한 땀에도 노력과 정성을 다한다. 최영재 기자

최근 몇 년 사이 세계적으로 캐주얼·운동복 위주의 스트리트 패션과 애슬레저룩(일상복과 운동복을 겸하는 옷)이 유행하고 있지만, 언제나 멋쟁이 신사의 의상으로는 슈트를 꼽는다. 특히 영국 런던의 맞춤양복 거리 셰빌로를 배경으로 한 영화 ‘킹스맨’(2015)의 개봉은 젊은 남성 관객들에게 “슈트는 현대 신사의 갑옷”이라는 대사와 함께 비스포크 슈트에 대한 열망과 낭만을 자극했다. 이후 국내에서도 고급 맞춤양복점들을 찾는 ‘영 앤 리치(young & rich)’ 고객이 증가했다.

김대철 대표의 꿈은 처음부터 ‘세계 최고의 비스포크 양복점’이었다. 김 대표의 이런 장담은 허튼소리가 아니다. 레리치는 일본 최고의 비스포크 공방인 ‘치치오’와 함께 유럽 슈트 장인들이 인정하는 곳이다. 핵심은 장인들이다. 레리치에는 현재 ‘한국의 셰빌로’ 소공로 양복거리에서 전설로 불렸던 맞춤양복 경력 30~40년 이상의 장인 4명을 비롯해 100% 수제 작업에 숙련된 직원 8명이 근무한다. 2021년부터는 이탈리아 최고의 비스포크 테일러(양복재단사) 안토니오 파스까리엘로에게 사사받은 수제자 이민엽씨도 합류했다. 이 ‘어벤져스’ 군단이 한 달에 만들 수 있는 슈트는 1인당 두서너 벌뿐. 최고를 위한 노력과 투자가 큰 만큼 레리치의 슈트 1벌 가격은 평균 400만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내로라하는 단골손님만으로도 제작일정은 늘 분주하다.

작업 중인 공방 장인들. ‘시침질’은 본격 바느질 전 두 장의 옷감과 심지가 서로 밀리지 않도록 꿰매두는 임시 방편이다. 재킷이 완성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작업이지만 장인들은 시침질 한 땀 한 땀에도 노력과 정성을 다한다. 최영재 기자

작업 중인 공방 장인들. ‘시침질’은 본격 바느질 전 두 장의 옷감과 심지가 서로 밀리지 않도록 꿰매두는 임시 방편이다. 재킷이 완성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작업이지만 장인들은 시침질 한 땀 한 땀에도 노력과 정성을 다한다. 최영재 기자

“이번 전시 내용을 쉽게 설명하면 입으면서도 잘 몰랐던 옷의 내부를 보여주는 거예요. 흔히 바느질한다, 꿰맨다고 하면 낱개의 원단을 붙이는 과정으로만 생각하지만 재킷 하나에도 수많은 부속과 원단이 필요해요. 그런데 인간의 몸은 입체 곡선이라 어느 한구석도 직선이 없어요. 재봉틀로 드르륵 일직선으로 박아서는 옷이 몸에 착 감길 수 없는 이유죠. 인간의 몸이 가진 굴곡대로 손바느질하는 비스포크 슈트를 입었을 때 ‘내 몸 같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고요.”

여기에 김대철 대표가 추구하는 ‘한국적 미감’이 더해진 게 레리치 슈트의 차별점이다. 두 장 또는 그 이상의 옷감을 접어서 한 조각인 듯 이으면서 맥북의 도톰한 모서리 곡선처럼 어깨선을 자연스럽게 바느질하기란, 일종의 ‘3차원 바느질’에 가깝다. 손가락 한마디 길이를 바느질 하면서도 바늘이 들어가고 나가는 방향과 각도는 그때그때 달라진다. 김 대표는 레리치의 작업 방식을 “백자 도자기를 굽는 것과 같다”고 했다.

레리치의 슈트 한 벌이 완성되기까지는 총 800단계의 공정이 필요하다. 모든 과정마다 룰이 있고, 이 매뉴얼을 지켜야만 미세한 뉘앙스마저 어색함 없는 옷이 탄생한다. 단, 모든 공정의 흔적은 완성품인 겉모습 어디에도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조선 백자의 우아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에서 흙을 고르고 빚고 굽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세상의 모든 옷들이 화려한 무늬·장식·형태로 서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할 때, 인간의 몸에 가장 가깝게 연결해주는 미세하고 복잡한 부분들은 모두 감추고 조선 백자처럼 조용히 빛나는 ‘겸손한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리암 길릭 등 전 세계 아티스트와 협업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미공개 건물. 자연과의 동화, 오래된 벽돌 소재가 눈에 띈다. 최영재 기자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미공개 건물. 자연과의 동화, 오래된 벽돌 소재가 눈에 띈다. 최영재 기자

레리치 홈페이지에 있는 배우 손석구와 김 대표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평소 관심 있던 곳이라며 직접 방문해 슈트를 맞췄던 그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 방송에서도 레리치 코트를 입고 등장했다. 그리고 이 인터뷰에서 “만족할 수 있는 연기란 사실 아주 미묘한 디테일에서 승부가 난다. 비록 알아봐주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그 미세한 부분에 온 힘을 쏟아 완성했을 때의 쾌감은 대단하다”며 “레리치와 작업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집요하게 디테일을 완성해나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역시 그래, 이렇게 하는 게 맞다,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전시가 열리는 소월로 138번지 2층 건물은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알려지지 않은 건축물이다. 700평 대지에 자리 잡은 2층 건물은 한동안 비어 있다가 몇 달 전 레리치가 이사하면서 일반인에게 오픈됐다.

김 선생은 생전에 “한국인에게는 어떻게 건물을 짓느냐보다 어디에 건물을 앉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을 만큼 자연과의 동화를 중요시했다. 갑자기 땅으로 숨은 듯 남산 산기슭에 고요히 들어앉은 집은 김수근 선생의 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부에 들어서면 황두진 건축가가 김 선생의 대표작인 ‘공간’ 사옥을 설명하며 꼽았던 “낮지만 답답하지 않은 공간, 좁지만 불편하지 않은 계단, 작은 공간과 큰 공간의 연결” 등의 특징들도 보인다. 무엇보다 벽돌집이다. 김 선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벽돌의 거친 느낌과 한 장 한 장 손으로 쌓아야 하는 과정이 상징하는 인간적인 따뜻함을 사랑한다”고 할 만큼 벽돌 소재를 좋아했다.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미공개 건물. 자연과의 동화, 오래된 벽돌 소재가 눈에 띈다. 최영재 기자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미공개 건물. 자연과의 동화, 오래된 벽돌 소재가 눈에 띈다. 최영재 기자

레리치 김 대표는 “건축의 미덕은 잘 낡아가는 것”이라며 “이 오래된 벽돌집을 보고 있으면 ‘건물이 나이를 곱게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가 슈트 전시를 기획하고, 공방 건물에 정성을 들이는 것은 모두 ‘분위기 있게 잘 늙어가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다. “오래 전부터 멋내기의 종착점이란 ‘자신만의 분위기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분위기란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죠. 즉, 아름답고 멋진 존재가 되려면 분위기 있게 살아야 합니다. 패션·예술·공예·건축 등의 개별 요소들을 섬세하게 선택·조율하면서 나만의 분위기를 만들어야죠.” 예사롭지 않은 전시도, 스토리가 있는 공방 건물도 모두 레리치만의 분위기를 위한 요소들이다.

김 대표는 공방 이사 전후로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여럿 시작했다. 우선 레리치 장인 한 사람이 비스포크 양복 한 벌을 만드는 공정을 전부 카메라에 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영상으로, 기획서 초안을 받아본 넷플릭스는 한 단계 심화된 계획서를 보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전 세계 아티스트들과의 협업도 진행중이다.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아티스트와 김 대표가 예술과 레리치 슈트가 추구하는 철학적 공통점에 대해 대담을 나누고 기록하는 일이다. 한국의 건축가 승효상, 영국의 설치미술가 리암 길릭과의 대담이 이미 성사됐다. 이 대담 내용들은 레리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데, 그중 리암 길릭의 말이 인상 깊다. “레리치의 재킷은 ‘시간을 초월한 어떤 형태의 상승’이다. 이 옷은 언제, 어디서 생산됐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또, 오직 내가 입었을 때만 좋아 보인다. 이건 가식적인 옷이 아니고, 옷이 나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내 몸과 이 재킷의 관계에는 평등이랄까, 균형이 있다.” 슈트에 대한 가장 지적인 찬사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면서도 지적인 슈트 전시 관람은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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