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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모술수男조차 찌질하다...오수재보다 우영우 열광하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화제의 법정드라마 두 주인공

요즘 방송중인 법정드라마 두 편이 눈길을 끈다. 채널 ENA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SBS의 ‘왜 오수재인가’. 둘 다 비범한 능력을 지닌 여성변호사가 주인공인데,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다. 법조물에선 이제껏 본 적 없는 착한 드라마와 법조판 ‘펜트하우스’라 할 독한 드라마의 한판 대결이다.

우영우 역의 박은빈

우영우 역의 박은빈

‘우영우’는 시청률 0.9%로 시작해 4주 만에 13%대(21일 기준)로 치솟으며 무서운 상승세다. 넷플릭스 비영어부문 글로벌 1위에 오르고 미드 리메이크까지 타진되고 있다. 천재 자폐 의사를 내세운 KBS 드라마 ‘굿닥터’(2013)가 ABC에서 리메이크되어 시즌 5까지 이어지며 전미 시청률 1위를 찍기도 했으니, ‘굿닥터’의 변호사 버전이라 할 ‘우영우’의 미래는 탄탄해 보인다. 데스게임과 좀비물로 득세한 K드라마가 다양성의 가치를 확산하는 주류 콘텐트의 미덕까지 갖췄으니 금상첨화다.

공정 키워드 투영시켜 동시대성 잘 살려

오수재 역의 서현진

오수재 역의 서현진

‘오수재’도 방영 2주 만에 시청률 10%를 돌파하며 화제였다. 그런데 초반의 매운 맛이 로맨스로 희석되며 6%대로 떨어진 채 이번 주 종방을 앞두고 있다. 대선 후보와 로펌 총수, 대기업 회장의 삼각 권력 카르텔을 까발리는 전형적인 사회고발 드라마인데, 초반 흥행을 이끈 건 오수재라는 ‘센 캐’ 자체였다. 고졸이지만 유리천장을 뚫고 꼭대기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만천하에 부르짖는 ‘독한 년’. 비리와 악행으로 점철된 거대권력의 ‘설거지’를 위한 권모술수가 주특기다. 밝고 쾌활한 캔디형 캐릭터로 사랑받던 서현진의 흑화도 볼거리였다. 대형 로펌의 쟁쟁한 남자 선배들을 독기로 제압하며 요즘 여성들의 현실적인 욕망의 대변자가 된 것이다.

한때 우리는 무한대의 상승욕구가 추동하는 막장드라마에 열광했다. ‘스카이캐슬’의 한서진(염정아), ‘펜트하우스’의 천서진(김소연) 같은 센 언니들이 태생적 콤플렉스를 감추고 최상층의 부와 지위를 가지려 몸부림 칠 때 온갖 막장 코드가 탄생했다. ‘비밀의 숲’ ‘로스쿨’ 같은 권력형 범죄 추리물도 환영받았다. 묻혀질 뻔한 일련의 사건들을 파헤쳐 가면 배후에 거대한 세력의 은폐공작을 마주하게 되고, 마침내 거대악을 단죄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우리 뇌구조였다.

두 장르를 버무린 게 ‘오수재’다. 열악한 환경과 우월한 두뇌를 갖춘 여성이 오기와 독기로 꼭대기에 도달하는 찰나 권력형 범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펜트하우스’처럼 고층빌딩에서 추락해 조형물에 내리꽂히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10년 전의 또 다른 살인과 의문의 교통사고, 출생의 비밀까지 자극적인 떡밥들이 한데 얽힌다. 거기에 대장동 게이트 등 실제와 유사한 정치적 이슈까지 치밀하게 버무려 리얼리즘 화풍의 암흑같은 빅픽처를 완성해 간다.

우영우의 사수 정명석 변호사 역의 강기영(왼쪽). [사진 에이스토리]

우영우의 사수 정명석 변호사 역의 강기영(왼쪽). [사진 에이스토리]

반면 ‘우영우’는 일견 그늘조차 없는 판타지다. 자폐인 가족의 ‘보기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자폐를 가진 변호사가 대형 로펌 식구들의 따뜻한 지지 속에 유능한 사회인으로 성장한다는 건 세상을 희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동화에 가깝다. 하지만 박은빈의 똑부러진 연기로 장애조차 매력으로 승화시킨 주인공이 부각됐을 뿐, ‘이상한’ 캐릭터보다 ‘우영우’를 신선하게 만든 건 소재로 쓰인 생활밀착형 사건들이다.

치매 남편을 돌보다 순간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노인, 결혼을 둘러싼 거액의 증여와 진정한 사랑 사이 길을 잃은 레즈비언, 자랑스런 의대생 장남의 자살을 인정하기 싫은 부모 자존심에 희생양이 될 뻔한 자폐인 차남, 브로커에게 떼인 돈을 받아내려 폭력을 휘두른 탈북자, 신도시 교통난 해결을 위해 도로를 내줘야 하는 소멸지역 주민들…. 법조물의 전형인 거대악 척결이 아니라 소수자와 소시민의 일상에 시선을 돌린 것이다. 마치 ‘굿닥터’가 겉으로 보이는 병증의 이면을 꿰뚫는 자폐 의사의 기발한 진단 너머에 저마다 사연을 가진 환자와 가족의 관계를 조명한 휴먼드라마였던 것처럼.

그럼 왜 오수재가 아니라 우영우인가. 둘 다 현란한 법률 지식을 장착했지만, 거대악과 맞짱뜨는 마라맛 ‘오수재’보다 한참 쉬운 상대와 싸우는 순한맛 ‘우영우’가 민심을 얻은 이유가 뭘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캐릭터의 진정성 차이”라면서 “오수재도 시작은 진정성이 있었다. 시대를 대변하는 문제적 인물을 제목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고, 그걸 독하게 밀고 나가는 걸 보고 싶었는데 멜로나 태생의 비밀 같은 공식으로 흘러가며 캐릭터가 무너졌다. 반면 우영우는 처음의 문제의식이 변함없다. 오히려 소덕동 에피소드처럼 캐릭터에서 비롯한 이야기를 사회적 약자들에게로 확장시켜 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오수재의 강적 최태국 회장 역의 허준호(왼쪽). [사진 SBS]

오수재의 강적 최태국 회장 역의 허준호(왼쪽). [사진 SBS]

거대담론이 미세담론으로 치환되는 트렌드의 변화로도 볼 수 있다. 권력에 맞서는 척 또 다른 권력으로 군림할 오수재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는, 사소한 듯 리얼한 우리 주변의 문제들을 창의적으로 해결해 가는 우영우를 응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거대한 권력형 범죄 피해자의 뻔한 복수극이 지겨워진 사람들에게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속 반전의 계기를 갖는 우영우의 활약이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면서 “가족이나 사랑이 구원이 안 되는 세상에서 가족드라마나 애정물도 힐링이나 일상적 이야기가 대세가 된 것처럼, 권력형 비리를 드라마가 처단해봤자 바뀌지 않는 세상에서 법조물도 소소한 위로를 주는 이야기에 눈 돌리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덕현 평론가도 “주인공이 악독해지다 못해 ‘악마판사’ 같은 사적 보복으로 치닫는 요즘 법조물에 피로해진 사람들이 판타지라도 착한 사람이 이기는 걸 보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전포인트는 ‘왜 정명석인가’ ‘왜 최태국인가’다. 두 작품 다 ‘남주’를 제끼고 ‘떡상’한 제3의 남성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우영우는 ‘한바다 최고 인기남’ 이준호(강태오)와 러브라인을 그리고 있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건 사수인 정명석(강기영) 변호사다. 부족함이 있는 신입에게 품었던 편견을 빠르게 버리고 든든한 격려자가 돼주는 시니어인데, 약속과 의리 때문에 법조인생을 포기한 미혼부 아빠처럼 대단히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쩌면 나에게도 나타날지 모르는’ 현실적인 멘토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사랑스럽다.

오수재도 멜로 상대 공찬(황인엽)보다 최태국(허준호) 회장과의 앵글에 시청자의 텐션이 올라간다. 최태국은 거대악의 실체이자 오수재를 어리바리 국선변호사에서 1등 로펌의 대표변호사로 키워준 막강 사수다. 공찬은 사건의 단초가 된 엄청난 과거를 품고 있지만 복수의 실행자가 되지 못하고 오수재에게 밥이나 해주는 힐링 캐릭터에 불과하다. 시청자들은 연하남과의 ‘뜬금포 러브라인’에 경악하며 채널을 돌렸고, 오히려 빌런인 허준호의 사악한 존재감이 시청률을 지탱했다.

우영우 신드롬, 현실로 이어질지 미지수

이영미 평론가는 “초기 직업드라마가 경찰서나 병원에서 연애하기 바빴던 건 드라마 주요 시청자인 당대 여성들에게 애정과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라면서 “경험치가 달라진 요즘 여성들로선 직업물에 연애가 끼어들어 초점을 흐리면 방해받는 느낌이다. 러브라인은 코믹 릴리프 정도의 쉴 틈을 주는 역할일 뿐, 직장 상사나 핵심 빌런의 역할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법조물 계보에서 ‘오수재’의 차별점은 여성인 주인공이 정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지향, 황금숭배로 유리천장을 뚫은 욕망의 대변자가 거대악을 짓밟고 올라서느냐 여부에 정의가 종속될 뿐. 그런데 결말이 궁금하지 않다는 게 한계다. 반면 ‘우영우’는 예측불가다. 유일한 빌런인 ‘권모술수’ 권민우(주종혁) 캐릭터가 부각되면서 반전이 시작됐다. 자폐인의 ‘자립’과 ‘연애’가 본격 화두가 된 것이다.

권민우는 핸디캡과 초능력을 겸비한 경쟁자에게 찌질함으로 맞서는 ‘이대남’의 화신이다.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있는 개념을 형상화해 저격한 셈이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공정이라는 요즘 키워드를 투영시켜 드라마의 동시대성을 잘 살린 캐릭터”라고 짚었다. 어쩌면 권민우는 동화처럼 착한 인물들 속에서 ‘이건 드라마일 뿐’이라고 외치는 소격장치가 아닐까. “이 게임은 공정하지 않다. 우영우는 매번 우리를 이기는데 정작 우리는 우영우를 공격하면 안 된다. 우영우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라는 대사가 우리의 문화다양성 수준을 고백하고 있다.

과연 독한 오수재도 못바꾸는 세상을 착한 우영우가 바꿀 수 있을까. 윤석진 교수는 “최근 장애인 단체의 이동권 관련 시위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인 것처럼, 평소 너그럽던 사람들도 이해당사자가 되는 순간 공정과 상식 운운하며 분노한다. 우영우에 분노하는 권민우도 그런 ‘나같은 사람’”이라면서 “과거에는 드라마가 곧 현실이었다. 드라마를 통해 인식이 바뀌고 사회적 의제 해결에 영향력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드라마와 현실을 완전히 분리하기 시작했다. ‘굿닥터’ 이후 자폐가 담론화되지 않았던 것처럼, 우영우 신드롬도 현실의 변화로 이어 질진 미지수”라고 진단했다.

드라마에 과몰입한 시청자들이 배우 SNS로 폭주할 정도로 권민우에 분노한 민심이 들끓고 있는 현상이 차라리 희망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우영우가 드라마를 찢고 나와 자립도 연애도 할 수 있는 세상은, 수용자인 우리의 변화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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