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빚 갚지 말라는 호소?” 역대급 빚 탕감에 도덕적 해이 우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98호 06면

소상공인·청년 빚 탕감 논란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18일 정부서울청사 기자실에서 금융부문 민생안정과제와 관련된 추가 설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18일 정부서울청사 기자실에서 금융부문 민생안정과제와 관련된 추가 설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빚 갚지 말라고 대국민 호소하나?”

“나라에서 시킨 대로 방역지침 따르고 빚더미 앉은 자영업자를 두 번 죽이는 것 같아요.”

“대출금 성실히 갚고 있는 사람들은 새 되는 건가요? 이번달부터 연체계획 잡아야겠네요.”

소상공인·청년 빚 탕감 정책을 담은 정부의 ‘금융부문 민생안정 계획’이 발표된 이후 한 자영업자 커뮤니티에는 이런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가 지난 14일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빚을 최대 90%까지 과감하게 탕감해주고, 주식과 암호화폐 등의 투자 손실로 어려움에 직면한 청년층의 채무 이자부담을 최대 50% 덜어주는 프로그램을 신설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면서, 성실하게 빚 갚아온 자영업자·청년을 두번 울리는 정책이라는 비난 글이 많이 올라왔다.

새출발기금 30조, 배드뱅크 역사상 최대

오는 9월 신설 예정인 소상공인·자영업자를 지원하는 새출발기금은 ‘과감한’ 원금 감면으로 화제가 됐다. 연체 90일 이상 부실차주에 한해서 60~90%까지 원금을 탕감해주겠다는 것. 금융위는 민생안정 계획 자료에서 신용회복위원회 0~70%, 국민행복기금 평균 54.6%, 법원 개인회생 평균 60%와 비교해서도 파격적인 수준이라는 설명도 달았다. 이렇게 과감한 지원 대상이 사실상 자영업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더 큰 관심을 불러 모은다. 새출발기금의 채무조정 대상은 코로나19 피해에 따른 손실보상금 지원대상자이거나 금융권 만기연장·상환유예 이용자다. 코로나19 이후 매출이 감소해 손실보상금을 받았다면, 매출이 100억원에 이르더라도 채무조정 대상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 자영업자들 사이에도 형평성과 도덕적 해이에 대한 논란이 상당하다. 한 자영업자는 “한달에 원리금을 200만원 넘게 꼬박꼬박 넣고 있는데, 괜한 짓을 한 건가. 지금부터라도 연체하면 탕감 받을 수 있냐”고 허탈해했다. 정부가 채무불이행을 조장한다는 비난이 상당하다. “90일 전화기 꺼놓고 잠수타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부터, “상환기간 연장이나 이자 감면이 아니라, 원금 탕감은 열심히 상환해온 사장님들 맥 빠지게 하는 정책”이라는 불만까지 다양하다.

세부 운영 계획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가 이례적인 지원 대상과 규모부터 발표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자영업자는 “신용과 빚을 맞바꾸는 것”이라며 “지금도 회생 신청하면 90% 가까이 탕감 받는대신 5년 동안 금융거래가 안되는 것으로 안다. 이미 있는 제도인데 말 장난해서 자영업자들만 또 욕 먹고 있다”고 분개했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새출발기금의 규모는 30조원으로 역대급이다. 과거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만들어졌던 배드뱅크(노무현 정부의 한마음금융, 박근혜 정부의 국민행복기금 등) 역사상 가장 큰 규모다. 그런데 역대급 배드뱅크 조성에 대한 공감대가 높지 않다. 일각에선 어려운 자영업자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은행에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온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출은 엄밀히는 돈을 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금융기관 사이에 사적인 계약인데, 여기에 당국이 개입을 한다면 왜 해야되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며 “돈을 못 갚는 사람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금융시스템이 흔들릴 때 당국이 나서야 하는데 현재 그 위험은 과거에 비해 줄어 들었다”고 말했다.

빚투 논란의 ‘청년 특례 프로그램’은 저신용 청년의 소득·재산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채무 이자율을 30~50% 감면해 주고, 3년간 원금 상환을 유예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금융위가 구제책 발표 당시 “많은 청년들이 저축대신 돈을 빌려 주식·암호화폐 등 위험자산에 투자했다 경제적·심리적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설명하면서 비난이 커졌다. 앞서 서울회생법원이 이달부터 “암호화폐나 주식 투자로 발생한 손실금을 청산가치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실무준칙도 내놓은 터라 ‘빚투’ 청년 특혜 논란이 더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부 교수는 “사회가 지원해야 할 취약층은 진짜 소득이 없고 자산이 없어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인데, 주식과 암호화폐 투자해서 손실 난 부분까지 다루면서 이 대책의 지원대상이 취약층이냐 취약층이 아니냐까지 논란이 넘어와 버렸다”고 지적했다. 민복기 한국재무연구소장(한국금융연수원 외래교수)는 “과거 구제책은 사회 전체적으로 이렇게 아주 보편적인 사람들까지 대상으로 포괄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너무나 폭넓은 사람들이 다 조금만 신경 쓰면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자극되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성실하게 빚 갚고, 지원 안 받으면 바보가 된 느낌이 만연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 오히려 사회 갈등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원 수준도 논란이다. 정부는 이번 청년 특례로 청년 약 4만8000명의 연간 이자 부담이 1인당 141만~263만원 줄어들 걸로 추산한다. 이에 대해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청년층을 지원한다면 연 3~5% 금리를 쓰다 연 20%짜리 사채로 치닫는 등 상황이 지나치게 악화하는 것을 막는 수준에서의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며 “사회적 합의 없이 초저금리로 이자를 깎아준다면 특혜다.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상환능력 없는데 채무 증가 악순환 가능성

정부가 역대급 빚 탕감 정책의 논란의 중심에 선 가운데, 한쪽에선 또 빚잔치에 나서 우려를 낳고 있다. 18일 신용보증재단중앙회과 각 지역신용보증재단이 코로나19 장기화로 피해를 본 소기업과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운전자금을 2000만원 한도로 연 1%대 이자로 빌려주겠다고 하자, 소상공인 사이에선 ‘신용점수 낮추는 방법’이 핫이슈로 떠올랐다.

초저금리 대출인 ‘중·저신용자 희망대출’과 ‘희망플러스 특례보증’은 저신용자일수록 금리와 상환기간 등의 혜택이 커진다. 저신용 소상공인(신용점수 744점 이하, 나이스신용평가 기준)은 2000만원까지 연 1%의 금리로 5년간 빌릴 수 있고, 중신용(신용점수 745~919점, 나이스신용평가 기준) 소상공인은 첫 해는 1%의 금리로, 2~5년차에는 ‘1.7%+CD금리’로 5년간 상환하면 된다. 고신용(신용점수 920점 이상) 소상공인은 1.5% 금리로, 1년만 빌릴 수 있다.

예금금리보다 낮은 1%대 대출에, 소상공인 사이에선 자금 상황을 떠나 일단 대출을 받아두자는 분위기가 확산 중이다. 대출 첫날인 18일에는 신용보증재단중앙회 홈페이지와 각 은행 앱에서 접속이 지연되고 한때 마비되는 등 북새통을 이뤘다. 이날 신용보증재단중앙회에선 하루에만 신청 건수가 1만8000건으로 집계됐다. 한 자영업자는 커뮤니티에 “딱히 쓸데없고 여유 자금도 좀 있는데, 거의 다 받는 것 같아 받아야 하나 기분이 이상하다. 이것도 나중에 탕감해주려나”라며 씁쓸해했다. 또 다른 자영업자는 “그냥 받아두자. 어차피 중도상환 수수료도 없다”고 적었다.

‘묻지마’ 대출 논란 속에 지원대상과 내용을 두고 ‘졸속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수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코로나19 관련 소상공인 금융지원정책 현황 및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중·저신용자 특례보증, 희망대출플러스 프로그램의 지원 대상이 처음에는 방역지원금 수혜자였으나 각각 소상공인 전체, 손실보전금 수혜자로 확대됐다”며 “지원대상과 규모가 적정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자칫 소상공인의 상환능력은 좋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채무만 증가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 연구위원은 “상환능력이 없는 차주에게 지속적으로 지원이 이뤄질 경우 차주의 부채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면서 오히려 금융 채무불이행자가 될 우려가 더 커진다”고 말했다.

외국선 채무 탕감 악용 사례 속출, 실형 선고 등 강력 처벌

징역 5년. 미국 뉴욕주 소거티스에 사는 쟝 라반챠(49)씨가 코로나19 팬데믹 지원 대출 사기로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형량이다. 그는 2021년 9월 유령 기업 4개 명의로 긴급급여보호프로그램(PPP)을 신청해 총 487만781달러(약 64억원)의 대출을 받은 뒤, 직원 급여로 지급한 것처럼 꾸며 자금을 빼돌렸다. 빼돌린 자금은 미국 미주리주 로커웨이 비치에 위치한 부동산과 고급 자동차를 구입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 북부지방 연방검찰청은 “소기업과 자영업자 특례 대출인 PPP 자금을 고용 유지와 사업 필수 비용 등으로 사용할 경우 전액 탕감해준다는 점을 악용한 사례”라고 전했다.

경제적 위기 상황에 놓인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대출 탕감 정책은 다양한 국가에서 시행 중이다. 미국에선 PPP 이외에도 일정 기간 대출금을 정부가 대신 상환하는 소기업 채무 경감(SBA Debt Relief) 제도와 경제피해재난대출(EIDL) 등으로 소기업과 개인사업자들을 지원했다. 캐나다도 소기업과 개인사업자를 대상으로 무이자 대출 프로그램인 CEBA를 실시했다. CEBA 대출을 받은 사람이 2023년 12월 31일까지 상환하면 총액에서 2만 달러를 탕감해준다. 일본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프랑스에선 사적 채무조정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속출해 감시에도 적극적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2021년 5월 17일부터 코로나19 사기 감시 태스크 포스를 운영하며 범정부 차원에서 대응하고 있다. 사기로 판명나면 부정 수급 금액 전액을 배상금으로 물리는 동시에 실형도 선고하는 식으로 강력한 처벌을 내린다. 캐나다 정부 역시 금융 정보기관인 FINTRAC를 통해 CEBA 대출 사기를 감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집계한 지난해 관련 범죄 의심 신고는 3만여 건에 이른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재무설계사 루이스 바넷씨는 현지 언론을 통해 “유튜브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구제 프로그램은 공돈이란 잘못된 인식이 퍼진 탓에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가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