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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사대부도 노자·장자 정도는 달달 외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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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유(儒)·불(佛)·도(道)가 스며든 삶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한때 조선시대를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계라고 비난하면서, 불교나 도교가 절멸됐다고 서술하곤 했다.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경직된 성리학의 시대’로 알려졌던 17~18세기에 불교 사찰이 가장 많이 중건됐으며, 유학자들이 도교 제사와 결합한 제사를 수행하고 정리했던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중앙일보 2021년 5월 28일자 24면〉

최근 K의 논문을 보니 조선 사상계에서는 『노자』를 읽고 연구하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몰려 멸문의 화를 자초할 수도 있었다고 나와 있다. 박세당(朴世堂)이 『신주도덕경』을 저술했고 그 때문에 귀양을 가서 죽었던 것처럼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세당이 경직된 정부와 학계에 진저리가 나서 1668년(현종9) 40세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고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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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체크부터 하자면, 박세당은 그때 은퇴한 게 아니라 약 6개월간 사신을 수행하여 청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왔다. 그 뒤로도 박세당은 양사(兩司)와 홍문관을 중심으로 관직을 이어갔다. 이런 사실은 인터넷 서비스 중인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박세당’을 검색하기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다.

“불교·도교가 절멸한 조선”은 오해
유학자도 노장사상 열심히 공부

“스님·신선이 나라 다스릴 수 없어”
유가적 실용주의로 국정 꾸려가

불교·도교 수용한 성리학의 탄생
이기론이라는 거대 우주론 낳아

조선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신선놀음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며 살고자하는 희망을 갖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신선놀음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며 살고자하는 희망을 갖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보자. 박세당의 ‘연보’에 따르면, 그는 1681년 노자(老子) 『도덕경』을 주해한 『신주도덕경』을 저술했고, 이듬해 『장자』를 주해한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저술했다. 이 일로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귀양을 가기는커녕, 1683년(숙종9), 1684년(숙종10) 잇달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됐다. 비록 취임하진 않았지만, 홍문관은 국왕의 경연을 주관하고 조선의 문치와 학술의 중심이었고, 부제학(정3품)은 홍문관의 장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노장(老莊) 연구가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남화경주해산보』는 교서관(校書館)에서 현종실록 활자를 지원해서 인쇄됐다.

이렇듯 박세당이 노자와 장자 연구로 탄압이 아니라 승진과 격려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조선 학자들이 노자를 멀리한 듯, 또는 박세당이 특별한 존재였던 듯 일부 연구자는 서술하고 있다. 기실 K의 조선 사상사에 대한 서술은 이미 학술적 언어가 아니다. 편견과 무지가 역사 탐구를 대신한 것이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물을 보는 고사(성품 깨끗한 선비)의 모습에서 도교와 유가를 분리할 수 있을까. 조선 사람들은 도교 경전 『참동계(參同契)』도 많이 읽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물을 보는 고사(성품 깨끗한 선비)의 모습에서 도교와 유가를 분리할 수 있을까. 조선 사람들은 도교 경전 『참동계(參同契)』도 많이 읽었다.

당시 시문(詩文)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위와 같이 무지한 말은 하기 쉽지 않다. 조선 식자층이라면 노자·장자의 글은 달달 외우고 있었음이 곳곳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일일이 예를 드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라면 ‘한국고전종합DB’에서 노자·장자를 검색만 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유희춘(柳希春)은 제문에서 ‘지웅수자(知雄守雌)’라는 『노자』 28장 ‘수컷의 강함을 알고서 암컷의 연약함을 지키면 천하 만물이 귀착하는 골짜기 같은 존재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를 인용하며 추도하는가 하면, 정두경(鄭斗卿)은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는 구절로 수필을 지었다.

노자

노자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수광(李睟光)은 『노자』 9장에 ‘공적을 이루고 이름을 이루면 몸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功成, 名遂, 身退, 天之道)’라고 한 말로 심희수(沈喜壽)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식(李植)은 31장 ‘잘 만든 무기는 불길한 연모이다(夫佳兵者不祥之器)’라는 말로 조선을 침략한 왜(倭)를 비판했다.

누구는 74장 ‘거장 대신 칼을 휘두를 경우 손을 다치지 않는 때가 거의 없다(夫代大匠斲, 希有不傷其手矣)’에서 나온 ‘대착(代斲)’이란 말로 관직을 거절하는 이유를 삼았고(이민서, 『서하집(西河集)』), 또 누구는 군제(軍制) 개혁을 주장하며 30장 ‘군대가 주둔하고 나면 가시나무가 돋아나고, 대군이 지나가고 나면 흉년이 들게 마련이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라는 말을 근거로 삼았다. (『승정원일기』 영조 4년 4월 4일)

‘허무적멸(虛無寂滅)’ 세계관 경계

박세당의 『장자』 연구서인 『남화경주해산보』. ‘현종실록 활자’로 인쇄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간행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박세당의 『장자』 연구서인 『남화경주해산보』. ‘현종실록 활자’로 인쇄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간행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사례가 수만 건이 넘을 것이므로 거론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다만 조선 유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에 대해 ‘허무적멸(虛無寂滅)’이라는 말로 정확히 선을 그었을 뿐이다. 스님과 신선이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와 가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과거시험에 불교·도교 문제를 내지 않았던 것은 사상적 편협성이 아니라 실용주의적 선택일 뿐이다.

박세당의 『장자』 연구서인 『남화경주해산보』. ‘현종실록 활자’로 인쇄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간행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박세당의 『장자』 연구서인 『남화경주해산보』. ‘현종실록 활자’로 인쇄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간행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학자들이 노자와 장자를 읽지 않았고, 이를 연구한 박세당을 귀양보냈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이유에 대해 P 교수는 “노자와 장자를 읽지 않았거나, 조선 사람들의 글을 읽지 않았거나, 둘 다 읽지 않았거나 셋 중 하나”라고 슬프게 진단했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한 가지 그림을 그려보자.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럭저럭 지낼 때도 있지만, 힘들고 덧없다는 생각도 한다.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그것마저 뜬구름 같고 복작거리는 세상도 부질없다. 부처는 복작거림을 업보(業報·Karma)라고, 그 무대인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보고는 집을 나간 뒤 해탈(Nirvana)을 향한 길을 걸었다. 죽음 뒤의 윤회(輪廻·Samsara)는 불교가 종교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장자

장자

노자는 문명의 번다함은 사람들이 빚어내는 작위(作爲)의 소산이라고 생각했다. 인의(仁義) 같은 규범이든 정부의 공권력이든 삶의 질서를 가져오기는커녕 교활함만 양산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노자의 우려대로 문명의 일상이 허구한 날 전쟁이었던 전국시대를 살았던 장자(莊子)는 서서히 붕새처럼 상상의 세계로 날기 시작했고, 훗날 도사(道士)와 신선(神仙)을 낳았다.

한편 공자는 노자처럼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을 이해하면서도, 그래도 인간(人間), 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지 어쩌겠냐고 말했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절망하지도 않고 국가든 사회든 어느 정도 통제해가며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맹자는 좀 더 적극적으로 그 가능성의 근거를 인간의 사단(四端)에서 찾았으니, 이들이 유가(儒家)였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며 등장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을 고전(古典·Classics)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사상에는 인간이 던질 수 있는 삶의 질문이 다 담겨 있다. 같은 시기에 그리스·로마에도 유사한 사상이 만개한 것을 두고 K 야스퍼스는 눈치 빠르게 이 시대를 ‘축의 시대(die Achsenzeit)’라고 불렀다.

‘산 사람은 살아야’ 현실로 복귀

공자

공자

부처·노자·공자는 서로 다른 분들이지만, 불교·도교·유가의 문제의식은 우리의 인생에서 수시로 뒤섞여 등장한다. ‘사는 게 고통이지’ 하는 순간 해탈이나 신선을 통한 초월을 갈망하기도 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면서 현실로 돌아온다. 부처·노자·공자로 표상되고, 종교나 사상으로 정식화됐을 때는 마치 다른 것 같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갖는 처지나 질문에는 혼융돼 있다.

유가는 당초 초월성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고려시대에도 정치는 유가, 종교와 사상은 불교의 선학(禪學)이 맡았다. 도교는 도관(道觀)을 중심으로 민속의 제사·수련·장수를 위한 연단(鍊丹) 등으로 이어졌다.

송나라 때 일어난 유가의 전면적 재해석은 고려 말~조선시대에 걸쳐 영향을 끼쳤는데, 이 거대한 흐름을 신유학=성리학=이학이라고 부른다. 성리학은 불교와 도교를 받아들여 이기론(理氣論)이라고 하는 우주론을 기반으로 세계를 재해석했다. 당초 성리학은 삼교회통(三敎會通)의 사상으로 성립했다.

종교전쟁이 없었던 이유

불교에 기반한 고려 문명과는 달리 조선은 신유학의 비전을 참고하여 문명을 만들어갔다. 그 주축이 사림(士林)이었다. 이들에게 불교나 도교 연구서가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스님들에게 왜 이슬람 연구서를 내지 않느냐고, 목사님에게 가서 왜 도교 사상 연구를 하지 않느냐고 트집 잡는 것과 다름없다.

세 사상은 서로 다른 영역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 도성 안에서 사찰을 퇴출한 일부터, 도교 체조와 수련의 채용에 이르기까지 갈등과 회통의 스펙트럼이 넓었지만, 종교전쟁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유럽 사회의 빈번한 전쟁 대부분이 종교와 관련된 것임을 고려할 때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고려나 조선 사람들이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종교의 영역에 가까웠던 불교나 도교 세력이 경제력을 확보하거나 신앙의 거점이 되기는 했지만 현실적 군사력을 확보하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힘을 행사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경우가 드물다. 더 탐구해볼 일이다.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