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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걸고넘어진 日, 바로 되치기…국제 기후담판 승부사, 정내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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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권 전 외교부 기후변화 대사. [정 전 대사 제공]

정내권 전 외교부 기후변화 대사. [정 전 대사 제공]

2008년 8월 26일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 국제 기후 협상이 진행되던 회의장에서 일본 대표가 느닷없이 한국을 걸고넘어졌다.
일본 대표는 한국·멕시코·싱가포르를 직접 거명하면서 선진국의 감축 의무를 수락하라고 요구했다. 사전 설명이나 협의도 없었다. 외교 관례를 무시한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현장에 있던 한국의 정내권 기후변화 대사가 곧바로 발언에 나섰다. 정 대사는 "옛 성현의 말씀에 자기가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일본은 자신의 감축 목표는 밝히지 않으면서, 협약상 의무부담 국가도 아닌 나라들에 의무를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받아쳤다.
정 대사의 발언은 방청석에 있던 환경단체 활동가의 박수를 받았고, 유럽연합(EU) 국가들로부터도 호응을 얻었다. 기후변화 대사 부임 후 처음 참석한 협상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일본의 도발을 물리쳤다.

1991년 외교부 초대 과학환경과장과 환경심의관, 유엔 사무총장 기후변화 수석자문관, 국가 기후환경회의 위원까지 환경외교 분야 직책을 두루 거친 정 전(前) 기후변화 대사(68)가 최근 '기후 담판'(메디치)이란 책을 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한국 지구환경외교의 산증인'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책에서 환경 외교 담판 12개 장면을 소개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이익 지키기 위해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가 과감한 승부수를 던지면서 위기를 해결한 장면이다.

환경 외교 담판 12개 장면 담아

정내권 전 기후변화 대사 '기후담판' 책 표지.

정내권 전 기후변화 대사 '기후담판' 책 표지.

그 담판 중의 하나가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지구 정상회의 때 벌어졌다. 당시 과학환경과장이었던 정 전 대사는 협상장에서 "선진국이 가진 환경기술에 대해 개도국의 접근이 원활히 이뤄져서 지구환경이 조속히 보호되도록 하기 위해 '특허의 강제 실시'가 허용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안은 선진국들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정 전 대사는 거의 혼자서 20여 명의 선진국 대표단에 맞서 8시간이나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그래도 결국 선진국 기업들이 가진 환경기술 특허를 개도국에 강제로 이전할 수 있다는 조항이 '의제 21'에 포함됐다.

2009년 4월 미국 워싱턴 주요 경제국 기후변화포럼에서 정 전 대사는 '자발적 온실가스 감축 국제등록부(NAMA Registry)' 설치를 제안했다. NAMA(Nationally Appropriate Mitigation Action)는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제시된 개념으로, 각국이 자신의 여건에 적절한 방식으로 온실가스 감축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는 의미다.

정 전 대사는 NAMA 개념을 인용, 개도국들이 여건에 맞게 감축 행동을 국제적인 등록부 형태로 약속하고, 이행하는지 모니터링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감축을 위해 노력하되 기후변화의 역사적 책임이 있는 선진국과는 달라야 한다는 원칙을 상기시킴으로써 한국의 '의무 감축' 부담을 덜어냈다.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모습. 강찬수 기자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모습. 강찬수 기자

정 전 대사는 "2015년 채택된 파리 기후협정도 사실 내가 제안한 국제등록부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서도 "파리 기후협정에서 개도국은 물론 선진국들까지도 자발적으로 이행 수준에 머물도록 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했다. 그 정도 수준의 합의를 위해서라면 기후변화 협상을 30년 가까이 끌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개도국도 CDM 사업 주도할 수 있게 해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현장에서 외국 대표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내권 전 기후변화 대사. 강찬수 기자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현장에서 외국 대표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내권 전 기후변화 대사. 강찬수 기자

그는 2000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교토의정서에 들어있는 청정개발체제(CDM) 사업에 개도국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했다.

선진국에서 개도국에 투자해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거기서 줄인 온실가스 성과를 선진국이 가져가는 제도가 CDM이다. 감축 의무가 없는 개도국은 CDM 사업 혜택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개도국도 상호 간 CDM 사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에 나설 것"이란 그의 논리가 먹혔다. 한국 기업들도 CDM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텄다.

정 전 대사는 1980년대 말 오존층 파괴 물질인 프레온 가스 규제 협상 때부터 활약했다. 몬트리올 의정서에서 선진국은 프레온 가스 사용량에 제한을 두지 않고 점진적으로 줄이도록 했으나, 개발도상국은 1인당 사용량을 연간 0.3㎏으로 묶기로 했다.
이미 한국의 1인당 사용량이 0.6㎏이었는데, 갑자기 0.3㎏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다른 개도국은 사용량이 적었고 한국만 유일하게 불이익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는 환경 외교 자체에 무관심했고, 몬트리올 의정서 협상에도 참여할 시기도 놓쳤다. 당시 외교부 경제기구과에서 근무하던 정 전 대사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돌파할 방안을 고민했다.

그는 '1990년 12월 31일 이전에 완공되는 프레온 가스 생산시설을 가진 국가는 1인당 사용량을 0.5㎏까지 인정한다'는 경과 규정을 찾아냈다. 그는 직접 국내 생산시설을 찾아 현황을 파악, 협상에 임했고, 결국 1인당 사용량을 0.5㎏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녹색성장' 개념을 처음 제안

2005년 유엔 아.태 환경.개발 장관회의 당시 기자회견 장면. 오른쪽부터 정내권 당시 아태 경제사회위원회(ESCAP) 환경개발국장, 김학수 ESCAP 사무총장, 곽결호 환경부 장관, 박영우 환경부 국제협력관. 강찬수 기자

2005년 유엔 아.태 환경.개발 장관회의 당시 기자회견 장면. 오른쪽부터 정내권 당시 아태 경제사회위원회(ESCAP) 환경개발국장, 김학수 ESCAP 사무총장, 곽결호 환경부 장관, 박영우 환경부 국제협력관. 강찬수 기자

그는 이명박(MB) 정부가 내건 '녹색성장' 브랜드의 원조이기도 하다. 2005년 3월 서울에서 '제5차 아시아태평양 환경·개발 각료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ESCAP) 환경개발국장이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개도국의 경제성장과 환경보전을 조화시킨다는 '녹색성장'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2008년 기후변화 대사로 부임했고, 2008년 7월 일본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MB가 참석했을 때 연설문에 '녹색성장' 개념을 넣는 데 한몫을 했다. MB 정부는 그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을 미래전략으로 선포했고,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자발적 탄소 가격 지불제 도입해야"

정내권 전 외교부 기후변화대사. 강찬수 기자

정내권 전 외교부 기후변화대사. 강찬수 기자

'기후 담판' 책에는 환경 외교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탈(脫) 탄소 미래 전략도 담겨 있다.

정 전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한국의 에너지 효율은 세계적인 수준이고, 에너지·산업 부문에서 온실가스 감축하기는 쉽지 않다"며 "자발적 탄소 가격 지불 운동, 교통 혼잡 비용 50% 삭감 목표치 설정 등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발적 탄소 가격 지불은 재생에너지로 생산하는 전력 수준에 맞도록 전기요금을 더 내자는 것이고, 철도 등 녹색 교통망을 구축해 교통혼잡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글로벌 차원에서의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서는 총생산기준 배출량보다는 국내 총소비기준 배출량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풍선효과를 유발하지 않으면서 지구 차원의 배출 총량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배출 총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총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에너지 프라이즈(Global Energy Prize)' 심사위원장인 그는 수상자 발표를 위해 지난 11~12일에도  러시아를 다녀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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