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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6평 집무실조차 필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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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영환 충북도지사

김영환 충북도지사

도지사 집무실을 88㎡(26.7평)에서 22㎡(6.7평)로 줄였다. 기존의 넓은 집무실을 회의공간으로 전환했다. 무거운 소파를 치우고 회의 탁자를 들여왔다.

나는 지금 자신과의 싸움 중이다. 이런 일을 벌이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지만, 기꺼운 일이기도 하다. 지난해 나와 아내는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증을 국가보훈처에 반납했는데, 요즘 그때의 비장한 심정으로 도청에 출근한다.

집무실 축소하고 관사는 반납
권위는 창의적 혁신에서 나와
기득권 버려야 상상력 생겨나

젊은 시절에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고, 20년 만에 막중한 충북도지사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 마음에 담고 있는 단어는 “허투루”다. 피 같은 국민의 예산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어느 회사 CEO의 방이 40여평이 되고 따로 사용하는 영빈공관과 혼자 쓰는 화장실이 있다는데, 조선총독부나 조선시대 궁궐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까? 몇 년 전에 구글가든과 페이스북 직원들의 사무실,시애틀의 스타벅스 본사를 둘러본 적이 있다. 나는 안다. 권위는 드넓은 사무실과 육중한 책상이 아니라 창의적 혁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김영환 충북지사는 18일부터 폭 2.7m, 세로 7.5m의 접견실을 도지사 집무실로 바꿔 사용한다. 최종권 기자

김영환 충북지사는 18일부터 폭 2.7m, 세로 7.5m의 접견실을 도지사 집무실로 바꿔 사용한다. 최종권 기자

이 얘길 하면 정신 나갔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6평의 집무실조차 필요 없다. 지금 스타벅스같은 카페가 도서관으로 되고 집무실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 육중하고 권위적인 사무실에서 공무원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까? 오직 지시와 복종만이 두꺼운 갑옷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수천의 공직자가 있는 공간에서 새로운 창의적인 생각이 분출될 수가 있을까?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공간을 기획한 사람의 생각이 변화를 지배한다. 내가 오늘 절망하는 것은 지난 85년 동안 수많은 지도자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놀라움이다.

개혁과 혁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낡은 생각을 버리는 데서 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기득권, 내가 가진 특권, 내가 가진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관사를 버렸다. 나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고 웅장한 ‘이전의 집무실’을 버렸다. 내가 버렸듯이 실장·국장·과장들이 사무공간을 줄이고 회의공간을 늘리고, 개인공간을 줄이고 공유공간을 늘리게 될 것이다. 종이를 줄이고 전자결재를 늘려야 한다. 결재와 보고를 줄이고 토론과 현장 방문을 늘려야 한다.

첫 출근을 하는 날 공간전문가인 김흥진 선생님을 오시라고 해서 공무원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일했을까? 지난 10년간 둘러본 전국의 중앙정부,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 공공기관을 통틀어 가장 열악해 보인다”는 진단이었다. “협업 없이 죽으나 사나 담당이 독자적으로 해결하면 다 같이 망함” “종이(보고)생산 최소화, A4종이 예산 80%절약, 캐비넷 최대한 폐기, 하급자 차 심부름 폐기 등.”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적이다.

도청을 옮겨야 하나, 일부를 신축해야 하나?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돈 들이지 말고, 부수지 말고 지금의 도청을 명품 미술관으로 만들자. 리모델링하는 데 수백억원을 쓰지 말고 1937년 일제하에서 건축한 아픈 역사의 현장과 문화재가 된 이 오래된 건축과 정원을 살려서 문화의 도청, 예술의 공간으로 만들 수는 없는가! 창조적 상상력에는 예산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자 충북도청이 어디도 따라올 수 없는 전통과 문화의 앤틱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의 공직자들이 와 보고 배우는 미술관이자 문화공간으로, 그리하여 일하고 싶고 출근하고 싶은 꿈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충북도청이 다시 태어난다면 전국 곳곳에서 불요불급한 건물을 짓고 호화청사에 엄청난 예산을 낭비하는 일도 줄지 않을까?

자연 훼손과 자원 낭비 없이 전통과 역사를 지키는 일은 작은 집무실을 갖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오래된 미래’인 도청을 새롭게 해석하고 창조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부활하는 일이다.

도청 입구에 “마주보는 당신을 섬기라”라고 써 두었다. 도민을 섬기는 일은 관사를 반납하고 넓은 집무실을 회의 공유공간으로 내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영환 충북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