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마음 읽기

잠시 쉬었다 가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남녘은 가물다고 하던데, 서울은 장마에 온종일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의를 걸치고 비 새는 곳은 없는지 조그만 도량(道場)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아이고 이런, 작년 여름에는 무탈하게 넘어갔던 처마 이음새가 이번 폭우에는 못 견디고 내려앉았나 보다. 빗물이 들이쳐 창고 벽과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법당이 아니길 천만 다행이네’ 싶으면서도 숨이 턱에 받치자 한숨이 났다. 지붕이 샐 뿐인데, 수리하면 그만인데, 이게 뭐라고 마치 내 인생이라도 찢어져 새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한 것일까. 순식간에 옷이 푹 젖었다. 끈적끈적한 습기가 온몸에 가득하다. 그렇게 쏟아지던 장맛비는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거무스름한 밤하늘만 남기고 이내 사라졌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싶은 여름
삶의 터전과 거리두기가 필요
욕망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져

도시의 여름밤은 볼품이 없다. 텁텁한 하늘과 무더위, 높은 빌딩들이 답답하다. 산사에선 툇마루에 걸터앉아 총총 떠있는 별들 바라보는 게 일상일 텐데… 어렸을 땐 평상에 누워 별 보다가 눈이 감기면, 살짝궁 어머니 등에 매달려 잠이 들었다. 그때의 그 따끈했던 어머니 등이, 메마른 허리춤이 축축한 날엔 더 생각이 난다.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한 목련존자의 효성 지극한 불교설화가 있다. 우리는 그의 효성을 본받으며 천 년 넘도록 매해 여름마다 백중(우란분절)기도를 하고, 먼저 돌아가신 선망 부모를 위해 공양을 올린다. 물론 진정 바라는 바는 후손들의 건강과 행복이다.

습도 높은 장마철에 땀 흘리며 기도하다 보면, 목적도 의미도 희미해진다. 문득 다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힘들 때 심약한 성향은 더 쉽게 드러나는가 보다. 내게 닥친 여러 복잡한 모순과 대립을 피하지 못하고 업력(業力)에 이끌려 의지가 약해진다. 출가자만 그런 게 아니라, 세속에 사는 이들도 많이 힘들 것 같다.

예전에 한 외국 친구가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서양인들은 쉬기 위해 일하는데, 한국인들은 일하기 위해 쉬는 것 같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감기 걸렸을 때 내리는 처방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우리는 여름에도 감기 걸리면 약 먹고 이불 덮고 따뜻한 몸을 만들지만, 서양인들은 한겨울에도 욕조에 찬물 받아놓고 거기 들어가 체온을 떨어뜨린다. 일이건 병이건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사뭇 다르다. 어쨌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산천 푸른 ‘성하(盛夏)’의 계절은 모든 존재에게 ‘잠시 쉬었다 가렴’ 하고 권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해인사에서 하는 ‘청년객실’이라는 템플스테이 안내문을 본 적이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청년! 몸과 마음의 휴식을 원하는 청년!(35세 이하 남성)”을 환영한다는 문구였다. 심지어 최대 7일간 숙박비 없이 나그네로 머물 수 있다고 하니 가볼 만 하겠다.

밤에는 별 쏟아지는 하늘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낮에는 툇마루에 게으르게 누워 투명하게 골짜기를 울리는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어보고, 그러다가 용기 내어 지나가는 스님이라도 좇아가 차 한 잔 청해 마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스님에게서 세상과 동떨어진 얘기라도 듣다 보면, 머지않아 돌아가야 할 일상의 소중함과 그 의미를 다시금 곱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새로운 일과 목적지가 아니라, 잠시라도 지금의 일터를 떠나고픈 마음이 든다면, 올 여름엔 절에 템플스테이라도 한번 가보길 권한다.

살다보면 자신의 터전에서 칭찬도 비난도 듣는다. 그런데 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를 요구받는다. 남이 나를 비난한다 해도 혼란에 빠져선 안 되고, 달콤한 말을 주고받다가도 오만해지면 금세 사람을 잃는다. 또 정작 자신들은 못하면서 남에게는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의 그물을 벗어나는 것은 더러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열심히 일하다가도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건 삶에 지쳐서이기도 하지만,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잠시 떠나 객관적 거리를 두고 자기 일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 하는 일에서 과감히 손 놓고 떠나보면, 새로운 관점이 생길 수도 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 결과적으로는 지긋지긋하고 힘든 상황과 일들이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잠시만 내려놓고 바라보자.

중국 당나라 조주스님 어록에서 한 구절 옮긴다. 어느 수행자가 조주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내려놓아라(放下着)”

“이미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얼 내려놓으라는 말입니까?”

“그럼, 다시 짊어지고 가라.”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