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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수인의 교육벤처

수포자를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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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수인 에누마 대표

이수인 에누마 대표

최근 뉴스와 SNS 타임라인에 ‘수포자 (수학포기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인 최초로 필즈상을 받은 과학자의 업적과 독특한 학창 시절이 화제가 되고,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어릴 때 선행학습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는 인터뷰 때문인지 그를 ‘수포자’라는 단어와 연결하거나 한국의 수학 교육에 대한 개선점을 찾으려는 기사들이 많다.

왜 수학 공부를 포기한 학생, 일명 ‘수포자’ 들이 생길까. 고등학생의 38%가 자신을 수포자로 여기고, 45%의 아이들이 수학에서 기준 학력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다지만 한국 학생들은 객관적으로 수학을 잘한다. 최근에는 순위가 조금 떨어졌지만 OECD 학업성취도 조사에서 여전히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고, 특히 수학 순위가 높다. 2018년 조사에서는 OECD 국가 중 일본과 에스토니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1~4위, 전체 참여자의 순서에서는 5~9위 권을 기록했다. 국제수학연맹이 올해 한국 수학의 국가 등급을 최고 등급으로 올렸다고 하니, 한국의 교육 제도가 수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지 못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은 객관적인 수학 선진국
영재에만 과도한 관심 말고
수포자 수준별 학습 고민해야

그렇다면 수학에 흥미와 재능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어떻게 잘 가르쳐야 할까. 한국에서는 아이가 수학을 못 하면 사교육으로 보충해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학교 진도를 따라잡을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학습을 못 하는 아이들의 문제를 공교육에서 해결해보려는 고민이 깊은 미국을 지켜본 바는 조금 다르다.

교육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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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중학교 수학에서 아이들 70%가 기준 학력을 충족하는 데 실패하는 나라이다. 그러다 보니 수학 실패의 징후가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 수학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수학 공포증에 대한 연구, 수학을 더 잘하는 사회적 요인을 이해해보려는 연구들이 있고, 이를 기반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단계에서 수 개념을 좀 더 잘 가르치고, 수학의 문제들을 실생활에 응용 가능한 문제로 표현하고, 수학 교실을 학년별이 아니라 수준별로 나누는 등의 다양한 대책이 시행됐다. “수학이 고등학교의 의무과목인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고등학교 수학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수긍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문과 과목에서는 막힘이 없었으나 수학·경제·과학, 하여간 숫자가 들어가는 것에는 흥미가 없어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잠만 잤던 필자도 조금은 동의한다. 서로 다른 역량과 환경을 가진 학생들이 모두 동일한 속도로 배우게 되는 12년간의 학습 과정에서 학습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려워진 수학 문제를 더 이상 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학생이 ‘수포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수학에 흥미를 잃는 것을 내버려 두는 상황은 개선해야 할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중학교 1~2학년 즈음에 수학 문제가 어려워져서 수포자가 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그러나 수학은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한다 해서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면 안 되는 과목이다. 수학 문제를 해결하면서 기르게 되는 문제해결 능력이나 추론 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경제활동을 위한 계산 능력을 배운다.

사회에 나가면 몇십만, 몇백만 단위에 이르는 숫자를 더하고, 빼고, 모으고,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단위를 나누고, 원가를 계산하고, 이자율이나 확률을 이해해야 한다. 혹여 학생들이 인생의 초반에 자신을 수포자라고 정의해버린 후 나중에 중학교 수준의 수학으로 찬찬히 해결할 수 있었을 중요한 경제적 결정들을 회피하는 일이 없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진도를 못 따라가는 학생들을 발견하면 쉬운 문제부터 다시 시작해서 수학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고, 계산기와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해서라도 현실과 관련된 문제를 풀어가도록 가르치고 연습시키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대다수 학생에게 수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복잡한 공학 문제나 학문의 난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 기술을 갖추는 것일 것이다. 학생들이 학습을 포기해야 하는 수준의 문제를 강요받지 않고 자신의 수준에서 중요한 문제를 풀게 된다면 수학을 포기할 일이 없지 않을까. 수학 영재뿐만이 아니라 둔재도 잘 가르치는 학교, 모든 아이가 자신의 수준에 맞춰서 어제보다 내일 조금 더 수학을 잘할 수 있게 되는 교육의 미래를 꿈꿔본다.

이수인 에누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