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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민원인 성폭행' 의혹에..."개인적 일" 선 그은 경찰들 [현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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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경찰서. 연합뉴스

서울 강남경찰서. 연합뉴스

지난 14일 새벽 4시30분 서울 강남경찰서 소속 A 경장이 성폭행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돼 이목이 집중됐다. 중립적 수사를 위해 사건을 넘겨받은 서초경찰서는 두 사람에 대한 1차 조사를 마치고 A 경장을 귀가 조치했다.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 B씨는 “성관계는 명확하게 거절했다”며 성폭행당했다고 호소했지만 A 경장은 “합의된 관계”라고 주장해 사건은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A 경장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는 수사와 재판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먼저 짚고 가야 할 지점이 있다. 경찰에 따르면, 사기 피해를 본 B씨는 고소장 제출을 위해 지난 11일 강남서를 찾았다. 당시 담당 수사관으로부터 “거래 내역 등을 추가로 내야 한다”는 설명을 들은 B씨는 추가 증빙 자료를 모은 뒤 이튿날인 12일 다시 강남서를 방문했다. 담당 수사관이 전날 당직으로 자리를 비운 사실을 알게 된 B씨가 쭈뼛쭈뼛 두리번거리자 “어떤 일로 오셨느냐”며 다가선 게 A 경장이었다고 한다. “(서류를)대신 전달해주겠다”며 호의를 베푼 A 경장은 B씨와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13일 경찰서 밖에서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3차까지 이어진 자리는 B씨 집으로 이어졌고 14일 새벽 B씨는 “강간 피해를 당했다”며 112에 신고했다.

두 사람의 접촉은 적절한가. 강남서 관계자들은 사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다. 일선서의 한 과장급 간부는 “B씨는 접촉이 금지되는 ‘사건 관계자’는 아니고 고소장에서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도 아니고 적힌 걸 본 것도 아니다”라며 “사적인 영역에서 벌어진 일인 거 같다”고 말했다. 18일 기자간담회를 연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 청장은 “(성 비위와 관련해) 지속해서 점검해왔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다시 한번 면밀히 점검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분(피해자)이 완전한 사건관계자는 아니었고 문의하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경찰 간부들의 인식은 경찰청장 훈령인 ‘경찰청 공무원 행동강령’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한 것이다. 이 훈령 제5조의2는 “수사 중인 사건의 관계자(해당 사건의 처리와 법률적·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는 자로서 경찰청장이 지정하는 자를 말한다)와 부적절한 사적 접촉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 밖의 시선은 싸늘하다. 집단적 성인지 감수성 부족이 부실한 행동강령으로 이어졌고, 그런 상황에서 일선 경찰관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제대로 될 리 없다는 지적이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인 장윤미 변호사는 “일반인들은 고소 절차가 굉장히 낯설어 수사기관에 대단히 많은 걸 의지할 수밖에 없다”며 “그런 민원인의 위축된 처지를 매우 악의적으로 이용해 접근한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 출신인 오선희 변호사는 “직접 담당자가 아니었다고 해서 직무 관련성이 없다는 식의 발언은 그 자체로 매우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경찰대 출신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민원인 등과 벌어진 경찰의 성범죄 의혹은 권력형 성범죄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부실한 행동 강령을 뜯어고치고 성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 실태에 대한 전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청은「2022년 경찰 성범죄 예방 및 근절 종합대책」을 지난 1월 발표했다. 이는 2020년 8월 내놓은 ‘경찰 성범죄 예방 및 근절 종합대책’보다 기준을 높인 것이다. 주로 경찰 내부 상·하관 사이의 성범죄 예방을 위한 지침 등이 담겨 있다. 서울 내 일선 경찰서는 경찰청 등의 지침에 따라 성범죄 예방 교육을 하고 있다. 교육을 이수한 적 있는 한 경찰관은 “민원인 등을 만날 때 언어적 성희롱 등을 유의하라는 내용 정도가 포함돼 있을 뿐 사적 접촉의 한계 등에 대한 명확한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다.

성인지 감수성의 부재, 부실한 행동강령, 형식적 교육의 3박자 속에도 희망이 있다면 취재 중 만난 일부 일선 경찰관들의 인식이었다. 수사 파트의 한 경찰관은 “대부분의 민원인이 절박한 심정으로 경찰서를 찾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적 접촉은 무조건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관은 “민원인은 담당이 아니라도 경찰관이라면 사건에 어떤 영향력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며 “용무가 있어 경찰서를 찾은 사람이라면 모두 사건 관계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날로 비대해지는 경찰의 수뇌부가 반드시 새겨야 할 ‘행동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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