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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열차 부족한 SR, 차세대 고속열차 발주 긴급 중단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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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강갑생 기자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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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 교통전문기자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고속열차인 SRT를 운영하는 수서고속열차(SR)가 올 하반기에 차세대 고속차량 14편성을 발주하려던 계획을 최근 긴급 중단했다. 사실 보유 열차가 부족해 운행 편수를 제대로 못 늘리는 SR 입장에선 열차 구매를 서둘러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런데도 발주계획을 일시 중지한 건 이례적이다.

속사정은 이렇다. 코레일과 SR 등 열차운영기관은 정부 방침에 따라 새로 고속열차를 발주할 때는 동력분산식(EMU) 열차로 해야만 한다. 현재 운행 중인 고속열차 KTX와 KTX-산천은 맨 앞의 동력차(기관차)가 객차들을 끌고 달리는 동력집중식이다.

잇단 탈선사고에 안전 이슈 급부상
영동터널·대전 사고 큰 피해 없는건
탈선때 충격 줄여주는 ‘관절대차’ 덕

발주 예정 최신 동력분산식 열차엔
관절대차 없어 안전장치 보강 필요

2018년 12월 강릉 부근에서 발생한 KTX-산천 열차의 탈선사고 모습. 앞쪽 2량이 ‘T(티)’자로 꺾였지만 관절대차로 이어진 나머지 객차는 약간 틀어졌을 뿐 피해가 크지 않았다. [연합뉴스]

2018년 12월 강릉 부근에서 발생한 KTX-산천 열차의 탈선사고 모습. 앞쪽 2량이 ‘T(티)’자로 꺾였지만 관절대차로 이어진 나머지 객차는 약간 틀어졌을 뿐 피해가 크지 않았다. [연합뉴스]

반면 동력분산식은 별도의 기관차 없이 객차 밑에 분산 설치한 모터들을 이용해 달리는 방식으로 가속·감속 능력이 뛰어나고 수송력이 더 크다. 독일·일본 등 고속열차를 운영하는 대부분 국가에서도 동력분산식을 채택하고 있다. 국내에선 서울과 안동·강릉 등을 오가는 KTX-이음과 시속 420㎞를 돌파한 바 있는 해무(HEMU)가 대표적이다. 또 현대로템이 코레일에서 수주한 최고시속 320㎞의 ‘EMU-320’ 2편성(8량 1편성)을 제작 중이다.

이처럼 동력분산식이 국제적 대세이고, 국내에서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는데도 SR이 주저하는 건 바로 ‘관절대차’ 때문이다. KTX와 KTX-산천에는 관절대차가 적용돼 있지만, KTX-이음과 EMU-320에는 없다. 대차는 바퀴와 차축 등 여러 장치로 구성돼 차체 중량을 지지하고 철도차량의 주행을 쉽게 하는 장치로 일반적으로 바퀴 4개가 달려있다. 일반열차는 통상 객차 한량 밑에 이런 대차가 2개 들어가고, 객차 사이는 별도의 연결장치로 잇는다.

SRT 열차의 객차와 객차 사이를 연결해주는 관절대차. [사진 SR]

SRT 열차의 객차와 객차 사이를 연결해주는 관절대차. [사진 SR]

하지만 KTX와 KTX-산천은 객차와 객차 사이에 대차를 넣는다. 이렇게 하면 객차 사이가 단단하게 연결되고, 유사시 충돌의 충격도 상당 부분 흡수되는 장점이 있다. 고속열차에 관절대차를 처음 사용한 건 프랑스의 TGV(테제베)다. 우리는 국내 고속철도에 TGV를 도입하면서 자연스레 관절대차를 쓰게 됐다. 독일 ICE(이체)나 일본 신칸센 등은 관절대차를 사용하지 않는다.

SR 관계자는 “그동안 국내외에서 발생한 고속열차 탈선사고를 보면 관절대차 적용 여부에 따라 그 피해 규모가 크게 차이 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8년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KTX-산천의 탈선사고를 보면 열차 10량 전부가 탈선했고, 특히 앞쪽 2량은 ‘T(티)’자로 꺾인 채 튕겨 나갔다. 얼핏 보면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사망자는 한명도 없었다.

전문가들은 당시 비결로 관절대차를 꼽았다. 객차들이 서로 관절대차로 연결돼 꽉 잡아주지 않았다면 탈선 충격으로 튕겨 나가거나 관성에 따라 차곡차곡 접히면서 서로 충돌하는 ‘잭나이프’ 현상이 발생해 피해가 컸을 거란 얘기였다. 관절대차로 연결되지 않은 맨 앞 동력차와 바로 뒤 객차만 ‘T’자로 꺾이고 나머지 객차는 약간 틀어진 정도에 그쳤던 것도 이 때문이다.

유사한 사례는 더 있다. 지난 1월 5일 충북 영동터널 부근에서 발생한 KTX-산천 탈선사고는 시속 300㎞로 달리던 열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버린 탓에 일어났다.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사망자 없이 7명 부상에 그친 데다 한량만 탈선하고 나머지 차량은 그대로 선로에 남은 것도 관절대차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동력집중식 동력분산식

동력집중식 동력분산식

그러나 1998년 6월 독일에서 발생한 열차사고는 정반대 결과를 낳았다. 함부르크로 향하던 ICE의 바퀴가 파손되면서 그 여파로 열차가 탈선했고, 잭나이프 현상까지 생긴 탓에 사망자만 103명에 달했다. 이달 1일 대전조차장역 인근에서 일어난 SRT 열차 탈선 역시 맨 뒤 동력차와 1호 객차만 탈선한 데다 다행히 경상자만 나온 것도 관절대차의 효과라는 해석이 많았다.

SR이 차세대 열차의 발주 절차를 긴급 중단한 것도 이 사고 직후였다. 익명을 요구한 철도전문가는 “열차 운영사로선 유사시 안전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며 “차세대 고속열차가 관절대차를 충분히 대신할 만한 안전장치를 갖췄는지 논의와 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얼핏 동력분산식 열차에도 관절대차를 적용하면 해결될 듯하지만 간단치 않다. 현재 전세계 고속열차 가운데 동력분산식에 관절대차를 쓰는 건 프랑스 알스톰이 제작해 이탈리아에 납품한 AGV가 유일하다. 현대로템에 따르면 동력분산식 열차에 관절대차를 넣으려면 부품 경량화·소형화가 필요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수송력도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 동력분산식 열차의 탈선 가능성을 줄이고 유사시 안전성을 높일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성균 국토교통부 철도안전운행과장은 “탈선 가능성을 사전에 감지하는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고, 탈선됐을 때 객차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하는 기능을 보강하면 관절대차의 성능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에선 유사시 이런 기능이 관절대차의 성능을 제대로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한 게 사실이다. 철도는 속도와 수송력도 중요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게 안전이다. 열차 방식과 안전 기능에 대한 치밀한 논의와 설계, 꼼꼼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