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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55개월 만의 한·일 외교회담…천천히 서둘러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강제징용 피해자 설득·합의가 선결 과제  

정치적 성과 급급해 졸속 처리해선 안 돼

일본을 방문 중인 박진 외교부 장관이 어제 오후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무상과 회담했다. 2017년 12월 강경화 전 장관의 방일 이후 4년7개월 만의 정식 외교장관 회담이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이에 대한 보복 조치인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발동, 뒤이은 한국 정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방침 발표 등으로 한·일 관계 악화의 골이 그만큼 깊고 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장관은 회담에서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일본 피고 기업 자산에 대한 한국 법원의 현금화가 실행되기 전에 조속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양국의 외교 책임자가 실로 오랜만에 무릎을 맞대고 관계 개선 필요성과 시급성에 공감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이는 미·중 대립 구도가 날로 첨예해지는 등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한·일 양자협력과 한·미·일 삼자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해진 상황에서 양국 관계를 과거사에 발목 잡힌 채 방치해 둘 수 없다는 공통 인식이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일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최대 관건이라 할 수 있는 강제징용 해결은 일본과의 외교 협상도 중요하지만 국내적으로도 초당적 합의가 이뤄져야 실행력을 갖는다. 이는 2015년 위안부 합의가 결국 온전히 실행되지 못하고 사실상의 백지화에 이른 과정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있다. 피해자 배상 재원을 한국 측이 충당하는 방안 등이 현재 거론되고 있는데, 여기엔 대법원 소송에서 승소한 징용 피해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정부가 피해자의 소송 대리인을 포함한 민관 협의체를 출범시켜 의견 수렴에 나선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일부 대리인이 참여를 거부하는 등 우려스러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협상안에 반대하는 단체들, 필요할 경우 야당까지 설득해 정권이 바뀌더라도 쉽게 뒤집을 수 없는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측도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나 재원 출연 등 성의를 보여야 한다. “대법원 판결로 인해 한국이 국제법 위반 상황을 만들었으니 한국 측이 국내적으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자세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 이는 한국 정부의 의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요컨대 국내 피해자 설득과 합의 과정이든, 일본과의 협상이든 어느 것 하나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졸속 해결을 서두르다가는 더 큰 화근을 남길 수 있다. 그렇다고 법원의 현금화 절차를 고려하면 주어진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강제징용 문제 해결이란 난관을 돌파하고 한·일 관계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윤석열 정부가 가진 최대한의 정치·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