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 풀리는 수학 난제...허준이 필즈상 뒤엔 이 '명품'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7.18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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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5일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가 평소 애용한다고 밝힌 분필 '하고로모'. 하고로모를 생산하는 세종몰은 최근 친환경 형광펜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지난 5일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가 평소 애용한다고 밝힌 분필 '하고로모'. 하고로모를 생산하는 세종몰은 최근 친환경 형광펜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지워지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풀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수학자의 반열에 오른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렇게 이 '도구'를 표현했다. 그가 깊은 애정을 표현한 필기도구는 분필이었다. 허 교수는 언론인터뷰에서 "분필 판서는 반드시 지워질 숙명을 지녔기 때문에 쓰는 순간 더 집중하게 된다"고 했다. 이젠 볼펜조차 쓸 일이 별로 없는 첨단 디지털의 시대에 그렇게 분필이 소환됐다.

허 교수는 "수학자는 분필의 마지막 수호자"라고도 했다. 수학자들이 디지털 시대에도 고수하는 분필의 매력은 뭘까. 수학자들과 함께 분필을 지키고 있는 또 다른 '수호자'를 통해 그 매력을 들어봤다. 허 교수가 사용하는 '하고로모' 분필을 만드는 신형석(52) 세종몰 대표다. 신 대표는 "분필이 내는 소리가 창의적인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고 분필의 매력을 설명했다.

90년 전통이 만들어낸 리듬에 빠져들다

유명 분필 브랜드 '하고로모'를 생산하는 신형석 세종몰 대표가 12일 오전 경기도 포천 사무실에서 자사의 분필을 소개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유명 분필 브랜드 '하고로모'를 생산하는 신형석 세종몰 대표가 12일 오전 경기도 포천 사무실에서 자사의 분필을 소개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신형석 대표도 수학, 그리고 분필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건축학을 전공해 대학 강단에 서는 꿈을 가졌던 그는 '잘 나가는' 수학 강사가 됐다. 16년 전 출장으로 찾은 일본의 한 재수학원에서 형광색의 부드러운 분필을 발견한 후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가 만난 것은 분필 수호자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하고로모'. 하고로모는 허준이 교수뿐만 아니라 안드레이 오쿤코프 등 필즈상을 받은 유수의 수학자들이 애용해 '분필계의 롤스로이스', '필즈상의 분필'로도 불리는 명품 분필이었다.

하고로모(羽衣)는 한자 그대로 날개옷이라는 뜻이다. 하고로모가 설립된 1932년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후지분필'을 넘어서는 "최고의 분필을 만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후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오다가 2015년 창업주의 손자인 와타나베 타카야스 사장의 건강이 나빠져 공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되면서 폐업 위기에 놓였다. 당시 신 대표는 수학 강사로 일하면서 부업으로 하고로모 분필을 수입하고 있었다. 신 대표의 사업을 걱정한 와타나베 사장은 그를 일본으로 불러 다른 분필을 납품받을 수 있도록 알아봤다고 한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제가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신 대표가 반 농담으로 건넨 말에 와타나베 사장은 "제조업은 꿈도 꾸지 마라, 너무 힘들다"고 말렸다. 이후 학원업계 지인들의 의견을 묻고 고민한 끝에 다음날 진지하게 인수 제의를 했다. "분필이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하고로모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가장 좋은 분필이 가장 먼저 없어지면 안 된다"는 신 대표의 설득에 반대하던 와타나메 사장도 결국 마음을 돌렸다.

신형석 대표가 일본 하고로모의 와타나베 사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신형석 대표 제공]

신형석 대표가 일본 하고로모의 와타나베 사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신형석 대표 제공]

그렇게 제조업에 뛰어든 신 대표는 분필의 매력으로 '리듬'을 꼽았다. "분필이 칠판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창의적인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고 믿는다. "생각하는 걸 쓰면서 딱딱딱딱 소리가 나는 리듬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리듬이 끊어지면 창의성도 끊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반 분필을 쓰면 툭툭 부러지기도 하고, 화이트보드 마카를 쓰면 자꾸 미끄러지고 잉크가 마르기도 하죠."

신 대표는 "수학은 다른 과목에 비해 판서가 많고, 아직도 대학 수학과 강의실에선 옛날 칠판과 분필을 쓰는 곳이 많다"고 수학과 분필의 뗄 수 없는 연결고리를 설명했다. 미국 언론에 소개된 구글 엔지니어 제레미 쿤의 얘기로 분필의 힘을 소개하기도 했다. 신 대표는 "그 엔지니어는 새로 개발한 기술을 설명할 때 꼭 칠판에 분필을 쓴다고 한다. '딱딱'거리는 분필 소리가 나자마자 모든 사람이 집중해서 판서를 쳐다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명 교수부터 인강 강사까지…분필 못 놓는 이유

 신형석 세종몰 대표가 12일 오전 경기도 포천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신형석 세종몰 대표가 12일 오전 경기도 포천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한국에서 하고로모 분필은 2000년대 말 유명 수학 강사 신승범 씨 등이 사용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인강붐'이 불자 영상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하고로모의 형광색 분필을 너도나도 찾기 시작했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자 난관에 봉착했다. 와타나베 사장의 철칙과도 같았던 품질을 고집하다 보니 경쟁사보다 가격이 3~4배 비쌌다. "뭐하러 비싼 분필을 쓰냐"는 학교들에 일일이 샘플을 돌리고, 분필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공장에서 40피트 컨테이너 16대에 달하는 기계를 전부 한국으로 가져와 재조립했다. 와타나베 사장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공장이 있는 경기도 포천까지 와서 생산 공정을 확인했다고 한다. 지난 2020년 와타나베 사장이 작고한 후에도 "일본에서 만들어질 때와 달라진 것은 '물' 뿐"이라는 게 신 대표의 설명이다.

하고로모가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등에서 알음알음 팔리던 어느 날 신 대표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쏟아졌다. 2019년 미 CNN이 운영하는 한 유튜브 채널에서 하고로모를 다룬 영상을 게재한 것이다. 미국 워싱턴대, 컬럼비아대 등 유명 대학의 수학자들이 총출동해 "하고로모 분필을 쓰면 문제를 틀릴 수가 없다" "천사의 눈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며 극찬하는 내용이 담겼다. 영상 조회 수는 2000만회를 돌파했고, 석 달 치 물량이 하루 만에 동날 정도로 주문이 폭주했다.

수학자들은 "좋은 분필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은 지금도 하고로모의 가장 열렬한 팬이자 홍보대사를 자처하고 있다. 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은퇴 행사에서 기념품으로 참가자들에게 하고로모 분필을 나눠주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위기…분필 놀이문화로 정착했으면”

지난달 25일 경기 포천에서 열린 '포천 거리아트페스티벌'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분필로 그린 그림 [세종몰 제공]

지난달 25일 경기 포천에서 열린 '포천 거리아트페스티벌'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분필로 그린 그림 [세종몰 제공]

잘 나가는 것만 같던 하고로모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전 세계 학교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분필 수요가 줄었다.

하지만 신 대표는 코로나19가 또 다른 기회였다고 말한다. 그는 초등학생인 아들이 집에서 온종일 태블릿 PC만 들여다보자 분필 놀이 세트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신 대표는 "해외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집 앞 골목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문화가 있다. 친구한테 보내는 메시지를 쓰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신 대표는 최근 쉽게 지워지는 분필의 특성에 착안해 26가지 색상의 수용성 분필을 만들었다. 지난달 25일에는 공장이 위치한 경기 포천에서 미국의 '초크 아트' 행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분필 아트' 행사를 열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선생님 없을 때 칠판에 장난하는 걸 좋아하잖아요. 분필은 글씨를 쓰기 위한 것이어서 크레파스나 마카와는 느낌이 달라요. 쉽게 쓰고 쉽게 지울 수 있어서 창의력을 자극할 수 있죠."

분필 덕분일까. 신 대표의 창의적인 생각은 계속되고 있다. 친환경 우드 플라스틱을 접목한 펜, 분필과 같은 패키지에 담은 핸드크림 등도 개발해 출시를 앞두고 있다. 분필을 만나고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신 대표는 "분필을 하나의 놀이 문화로 정착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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