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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수정의 시선

탈북자 돌려보낸 판문점의 야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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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귀순의사 전혀 없었다” 거짓 들통

살인마 프레임 씌워 강제북송 옹호

탈북 희망 꺾고 김정은 체제 도와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눈을 가리고 손을 묶다니. 누구의 발상일까. 23세, 21세 북한 청년이 경찰 특공대에 잡힌 채 몸부림치다 북한군에 넘겨지는 모습. 인민재판 사진이나, 극단주의자들이 인질을 해하는 동영상에서나 본 장면 아닌가. 처형 직전 포승줄에 묶인 장성택, 중국 공안에 짐승처럼 끌려 나온 탈북자들의 모습도 겹쳐진다. 분단 상징 판문점의 흑역사에 한 점을 추가할 그 야만적 장면의 연출자, 대한민국 정부였다.
 2019년 11월의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진실을 규명하는 걸 놓고 야당은 “신북풍 여론몰이"라고 공격하지만, 이 사건을 규명하라는 요구는 오래됐다. 북송 당일인 11월 7일 안보실 1차장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가 언론 카메라에 찍혀 '발각'된 이후 유엔과 국제인권단체까지 나서 진상을 밝히라고 해왔다. '카더라 통신'으로 알려진 내용이 통일부의 사진 공개로 "보기에도 고통스러운"(크리스 스미스 미 하원 톰 랜토스 인권위 의장), 실재한 일인 게 확인됐을 뿐이다.

2019년 11월 7일 국회에서 찍힌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의 스마트폰 메시지. 탈북 주민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려는 계획이 드러났다. 오른쪽은 당일 북한 선원 2명이 몸부림치며 송환을 거부하는 모습. 거의 3년 만에 사진이 공개됐는데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이들이 귀순을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었다. [뉴스1]

2019년 11월 7일 국회에서 찍힌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의 스마트폰 메시지. 탈북 주민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려는 계획이 드러났다. 오른쪽은 당일 북한 선원 2명이 몸부림치며 송환을 거부하는 모습. 거의 3년 만에 사진이 공개됐는데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이들이 귀순을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었다. [뉴스1]

 당시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귀순 진정성이 없었다"며 여지라도 뒀지만, 강제 북송 최종결정권자였던 정의용 전 안보실장은 지난해 외교장관 청문회에서 "귀순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주 제네바 대사 등을 지낸 외교관 출신으로 인권 관련 국제사회의 기준,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이기에 당혹해 하는 외교부 후배들이 많았다.
 정 전 실장이 17일 입장문을 냈다. 첫째 항 제목이 '흉악범들의 범죄 행각'이다. 판문점 사진, 귀순 의향서가 나온 뒤 야당이 제기하는 프레임이다. 정 전 실장은 "김책항에서 출발한 이들은 선장의 가혹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16명을 차례로 불러 내 하룻 밤새 살해한 희대의 엽기적 살인마다. 합동신문 자백 내용은 공범 한 명이 북한에 체포된 후 우리 군이 입수한 첩보와 일치한다"고 했다. '자백' 외 범죄를 확인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봤다 한다. 증거물인 배를 방역 조치까지 해 북한에 넘긴 건 우리 정부였다.
 '엽기적 선상 범죄'에 대해 탈북민들은 달리 얘기한다. 김흥광 북한인권탈북단체총연합 대표는 북한 실상과 맞지 않는 플롯이라고 했다. "선장의 갑질? 생활총화를 하는 북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19명 속에 당세포, 청년동맹세포 다 있다. 출항, 입항도 세 기관이 교차 감독한다. 근데 16명을, 그것도 16t급 오징어잡이 배에서 죽이고 귀항했다니. 탈북 사건이 나면 '강간범' '살인범'으로 몰아 하부기관으로 전달하는데 그걸 첩보로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김 대표는 "귀순 거짓말이 들통나니 흉악범 프레임 동아줄을 잡은 것 아니냐"고 했다. "김책시 인구가 22만이다. SNS는 없지만 특대형 사건은 말로 확 퍼진다. 김책 출신 탈북자들이 현지와 연락하는데, 관련 얘기가 나온 게 없다." 그간 탈북민 커뮤니티에선 16명이 탈북 시도 중 잡힌 주민이고, 북송 청년들은 탈북 브로커란 주장도 제기됐다.
 공교롭게도 선상 살인 혐의는 인권 변호사 문재인이 "가해자도 동포로서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는 논리로 변호해 살인범들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킨 '페스카마호' 사건(1996년)과 흡사하다. 선장의 가혹 행위에 불만을 품은 조선족 6명이 한국인 6명 등 11명을 조타실로 한 명씩 불러내 처참하게 죽인 사건이다. 19세 실습생도 희생됐다. 이 배는 260t급 대형 어선이다.
정의용 전 실장은 지난해 토론회에서 "NSC상임위 차원의 토론을 충분히 거쳤다"며 대통령에겐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이 NSC 의장이라 납득은 안 되지만 그의 말을 믿어야 얘기가 된다. 보고를 받았다면 당연히 "가해자도 동포로서 품어야 한다"며 강제 북송하면 안 된다고 했을 것 아닌가. 더구나 조선족보다 가까운 북한 동포다.
 탈북민은 헌법상 우리 국민이다. 그게 아니어도 무죄 추정 원칙과 사법 절차에 따라 수사해야 한다. 설사 흉악범이라 해도 고문·살해 위험성이 있는 곳에 송환해선 안 된다. (유엔 국제난민규약) 그게 법치·민주 국가의 상식이다. 특히 정체성을 '진보'에 둔 정부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북한이 요구하지 않았는데 먼저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엽기적 인권 유린의 형태로 몰래 보내려다 들켰다. 문 정부의 대북 과몰입과 맞물려 '인신 공양' 의혹까지 받는 것. 이 게 이 사건의 본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환상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열었다. 1년 반 뒤 그 자리에서 발버둥 치는 북한 주민을 강제로 북한에 넘겼다. 북한 주민에겐 '오면 보낸다'는 메시지다. 9.19 군사합의 이후 북방한계선(NLL)에서 월남하는 소형 목선은 묻지도 말고 북쪽으로 밀어내라는 매뉴얼을 적용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북전단 금지법 등과 함께 결과적으로 김정은 체제가 더 공고해지도록 도왔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쉼 없이 증진해온 대한민국의 명예회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