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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나가사키를 최후의 피폭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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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죽음 이후, 일본은 어디로 향할까. ‘아베의 숙원’이었던 헌법 개정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방위비를 증액해 ‘전쟁할 수 있는 일본’으로 나아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군국주의의 비극을 되새기며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가 그 중심에 있다.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에 있는 '원폭 돔'.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입은 건물을 보수하지 않고 반핵 교육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에 있는 '원폭 돔'.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입은 건물을 보수하지 않고 반핵 교육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 공격을 암시했을 때, 이곳 원폭 피해자들은 비판 성명을 냈다. 미국 핵무기의 일본 배치를 검토해야 한다는 아베 전 총리의 주장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곳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오는 8월 원폭 투하 77주년을 맞아 지난 14~15일 만난 원폭 피해자들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며 “지옥 같은 경험을 그 누구도 다시 겪어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14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자신의 피폭 경험을 증언하는 원폭 피해자 가지모토 요시코씨. 이영희 특파원

14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자신의 피폭 경험을 증언하는 원폭 피해자 가지모토 요시코씨. 이영희 특파원

“태양이 터지는 줄 알았다” 기억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도시는 저녁처럼 깜깜해졌고, 인구 35만 명 도시에서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가지모토 요시코(梶本淑子·91)는 원폭 투하지로부터 2.5㎞ 떨어진 학교에 있었다. “태양이 터졌나 싶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났고 무너진 건물에 깔려 기절했습니다. ‘도와줘’ ‘살려주세요’ 하는 친구들의 비명이 지금도 생생해요.”

가지모토씨는 히로시마에서 활동 중인 ‘피폭 경험 전승자’ 32명 중 한 명이다. 코로나19 이전엔 1년에 130~150회,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 자신의 경험을 알렸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일본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와 “화가 났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원폭의 피해를 몰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며 “평화를 위한 전쟁은 없다. 전쟁을 막기 위해 핵을 가져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지난 14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을 둘러보는 방문객들. 이영희 특파원

지난 14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을 둘러보는 방문객들. 이영희 특파원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과 평화공원 내 ‘원폭 돔’은 팬데믹 이전엔 연간 170만 명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원폭 현장에서 재가 돼버린 사람들, 시신을 쌓아 놓고 화장을 하는 장면, 인간의 흔적이 그림자로 남아버린 계단 등을 보여주며 핵무기의 위험성을 전한다.

지난 14일 자료관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날의 참혹한 장면에 경악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일본인이라면 원폭 피해를 알고 있지만, 그 실상을 직접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 도우야 도시히로(豆谷利宏) 부관장의 설명이다.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초등학생들이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초등학생들이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도우야 부관장은 후대에 핵의 참상을 알리는 것이 ‘히로시마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어 상황은 어렵기만 하다. 내년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6년 히로시마를 다녀간 후 외국인 관람객이 크게 늘었다”며 “G7 회의가 세계에 전쟁의 위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일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의 시노자키 게이코 관장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떨어진 원폭의 실물 크기 모형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의 시노자키 게이코 관장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떨어진 원폭의 실물 크기 모형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점점 사라지는 전쟁의 흔적

나가사키시에선 ‘나가사키를 최후의 피폭지로’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자며 학생들 대상의 평화 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5일, 나가사키 투하지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있는 시로야마(城山) 초등학교를 찾았다. 1945년 8월 9일 당시 재학생 1500여 명 중 1400명이 사망한 곳이다.

이 학교 학생들은 연간 70~80시간씩 평화 교육을 받는다. 저학년 때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평화의 개념에 대해 배우고 고학년에선 세계정세와 전쟁,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에 대해 학습한다. 15일엔 6학년 학생들의 발표회가 열렸다. “평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교사의 질문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답했다. “불안하지 않고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겁니다.”

일본 나가사키시에 있는 시로야마 초등학교 학생들이 핵의 위험성과 평화의 중요성을 배우는 수업을 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나가사키시에 있는 시로야마 초등학교 학생들이 핵의 위험성과 평화의 중요성을 배우는 수업을 하고 있다. 이영희 특파원

다케스에 히로유키(武末弘之) 시로야마 초등학교 교장은 “나가사키 아이들이 평화를 전파하는 리더로 자라나길 바란다”며 “세계 여러 학교와 교류하며 평화교육의 중요성을 알릴 것”이라고 했다.

"G7 정상들, 원폭 피해자 만나길"..마쓰이 히로시마 시장 인터뷰

히로시마를 선거구로 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핵 없는 세계'를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내년 5월 19~21일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개최지로 "평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장소"라며 히로시마를 낙점했다.

14일 만난 마쓰이 가즈미(松井一実) 히로시마시 시장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핵무기 철폐가 아주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며 "G7에서 이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인터뷰에서 G7 개최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마쓰이 가즈미 히로시마 시장. 이영희 특파원

지난 14일 인터뷰에서 G7 개최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마쓰이 가즈미 히로시마 시장. 이영희 특파원

6월 열린 유엔 '핵무기금지조약(TPNW)' 회의에 시장 자격으로 참가했다.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인류는 핵 전쟁 위험에 떨어야 한다는 것을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여준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핵무기를 없애는 것밖에 없다. 핵무기 피해를 직접 겪은 히로시마의 마음을 전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참가했다.
일본 정부는 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데.
핵무기금지조약은 기존 핵보유국을 인정하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한걸음 더 나간 것이다. 핵 보유국을 비롯해 미국의 '핵우산'에 들어있는 나라들도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에도 계속해서 조약 참가를 촉구할 계획이다.
내년 G7 정상회의 개최를 위한 준비는.
G7 국가들 대부분이 핵 보유국 아닌가. 이 나라의 리더들에게 어떻게 피폭의 참상을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상들이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핵무기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지 직접 들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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