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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 붉은여우의 부산행…홀로 400㎞ 내달려 간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지난 12일 오전 11시쯤 부산 해운대 달맞이공원 인근 야산. 전날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수풀 속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동물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흔한 길고양이처럼 보이지만 이 동물의 정체는 붉은여우.

부산 해운대 야산에서 포착된 붉은여우. 사진 독자 신병륜씨

부산 해운대 야산에서 포착된 붉은여우. 사진 독자 신병륜씨

환경부가 출산과 야생 적응 과정을 관리하는 1급 멸종위기종으로, 국내에 100마리가 채 남지 않은 ‘귀하신 몸’이다. 등산객이 삶은 닭가슴살을 던져주자 여우는 쏜살같이 내달려 고기조각을 입에 물었다. 닭고기를 뜯으면서도 연신 주위를 살피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먹이를 던져준 등산객은 “먼 길을 달려왔다고 들었다. 잘 먹고 기운을 차려 무사히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화 도중에도 코를 박고 고기를 뜯는 여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국 쥐잡기 운동’에 급감한 붉은여우, 400㎞ 내달렸다

16일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달 중순부터 해운대 달맞이공원 주변에 출몰하는 이 붉은여우(개체 고유번호 SKM-2121)는 경북 영주에서 왔다.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연구원 생태보전실이 관리하는 암수컷 교배를 통해 지난해 3월 태어났고, 먹이활동 등 야생적응 훈련을 거쳐 지난해 12월 영주 소백산 일대에 다른 여우 4마리와 함께 방사됐다. 현재 몸길이 약 70㎝, 몸무게 5㎏가량이며 목에 위치 추적 장치가 부착돼있다.

붉은여우의 야생 적응 훈련. 사진 환경부

붉은여우의 야생 적응 훈련. 사진 환경부

환경부가 공개한 이동 경로를 보면 이 붉은여우는 처음 방사된 영주 산기슭에서 단양군을 거쳐 강원도로 진입한 뒤 능선을 타고 영월ㆍ평창군을 지나 동해시까지 이동했다. 이후 남쪽으로 방향을 꺾은 붉은여우는 동해안을 따라 울진·포항·울산을 거쳐 부산까지 국토를 종단했다. 전체 이동 거리가 400㎞에 이른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원혁재 국립공원연구원 중부보전센터장은 “붉은여우는 무리생활하다가 성장하면 독립한다. 이 붉은여우는 독립 과정에서 적절한 서식처를 찾던 중 장거리 이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최초 영주를 벗어날 때는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혁재 센터장은 이어 “본래 붉은여우는 한국 토종으로, 민가 인근 야트막한 산에 살며 특히 쥐를 주식으로 삼았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전국에서 쥐잡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자 먹이를 구하지 못하게 됐다.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멸종 위기에 놓인 종으로 지정 관리해왔다”고 말했다. 2012년부터 붉은여우 복원사업을 진행해온 환경부는 국내에 야생 붉은여우 74마리가 남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붉은여우는 들쥐·꿩·너구리 등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다.

한국에서 쥐잡기운동은 1960년대 초 시작됐다. 1961년 미국 대외원조처(USOM)의 제안으로 전국 특정 지역에서 선별적인 방제작업이 진행됐다. 1963년부터는 농림부가 중심이 돼 쥐잡기에 나섰고, 1964년에는 최초로 전국 동시에 쥐잡기운동을 했다. 6000만 마리에 이르는 전국의 쥐가 양곡 생산의 20%를 먹어치운다는 지적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런 쥐잡기는 1970년대 초반에 절정에 이르렀다. 1년에 두 차례씩 전국 동시에 쥐잡기가 진행됐다. 하지만 국가적 쥐잡기운동이 농림부 주관이 아닌 무임소장관이 주도하고, 효과가 떨어지는 추운 겨울에 진행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한 달째 안 잡히고 사람 손 타… “야생성ㆍ건강 잃을까 우려”

국립공원연구원 측은 지난달 14일 직원 2명을 해운대에 파견했다. 이들은 붉은여우를 다시 포획한 뒤 연구원으로 데려가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재훈련을 거쳐 자연으로 돌려보낼 계획이다. 부산 도심에 자리한 달맞이공원은 인근 주민은 물론 외지인도 많이 찾는 명소인 데다 차량 통행량이 많아 붉은여우가 서식하기 부적절한 곳이라는 게 국립공원연구원의 판단이다.

하지만 붉은여우를 잡아들이는 데 한 달 넘게 애를 먹고 있다. 국립공원연구원 측은 먹이를 통해 여우를 포획틀로 유인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국립공원연구원 관계자는 “멸종위기종인 데다 장거리를 달려 낯선 환경에 있는 만큼 건강 상태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마취총은 위험할 수 있어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방사되기 전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방사되기 전 붉은여우. 사진 환경부

달맞이공원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붉은여우가 산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측은지심에 먹이까지 챙겨주려는 ‘캣맘’ 등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야생동물 전문가로 실제 이 붉은여우 동향을 살피고 있는 이종남 부산야생동물협회 부회장은 “삶은 닭가슴살은 물론 시중에 유통되는 참치캔 등 음식을 붉은여우에게 주려는 시도가 많은 것으로 파악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붉은여우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 부회장은 “야생 생존의 핵심은 먹이활동이다. 먹이를 주는 행위가 반복되고 가공 음식에 입맛이 길들면 붉은여우가 야생에서 먹이를 구하는 능력을 저해할 수 있다. 이는 재훈련을 통해서도 되돌리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방사 이전에 광견병 등 기본적인 예방접종을 했겠지만, 사람과 접촉이 계속되면 바이러스 등 질병에도 노출될 수 있어 하루빨리 포획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강조했다.

붉은여우.

붉은여우.

붉은 여우는 다 자라면 몸길이 약 60~90cm, 꼬리길이 약 30~60cm, 체중 6~9kg이 된다. 개체에 따라 크기 차이가 심해서 어떤 것은 작은 종류의 2배나 되는 것도 있다. 빛깔 역시 밝은 적색에서 오렌지색 또는 갈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잡종인 은색이나 흑색여우는 이 종의 단순한 변이종이다.

생김새는 전체적으로 홀쭉하고, 주둥이는 길고 뾰족하다. 귀의 뒷부분과 네 다리 밑은 다른 부위보다 빛깔이 어둡고, 꼬리는 굵고 긴데 끝은 희거나 검다. 단독 또는 암수 한 쌍이 함께 굴을 파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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