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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못했지만 우린 된다...예수가 알려주는 '물위 걷는 법'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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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사람들은 따진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비유일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지금도 ‘물 위를 걷는 예수의 이적’은 논란이 되기도 한다.

나도 궁금했다. 예수는 왜 하필 물 위를 걸었을까. 눈먼 사람을 고치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는 이적은 그래도 낯설지 않다. 어딘가 익숙한 일화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장면은 상당히 독특하고 낯설다. 더구나 사막 위에 세워진 이스라엘 땅에서 말이다. 기적의 배경이 왜 하필 물 위였을까.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 위로 새가 날고 있다. 수면이 잔잔하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이 생각한 천국의 바다에도 파도가 치지 않았다. [중앙포토]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 위로 새가 날고 있다. 수면이 잔잔하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이 생각한 천국의 바다에도 파도가 치지 않았다. [중앙포토]

(53)예수 당시 유대인이 본 천국의 풍경은 어땠을까

예수 당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음부론(陰府論)’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요세푸스는 제사장 가문의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다. ‘음부론’에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천국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천국은 잠도 없고, 슬픔도 없고, 타락도 없고, 걱정도 없는 곳이다. 천국은 시간으로 재는 낮과 밤도 없고, 필연적 법칙에 의해 천체 사이를 움직이면서 인생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계절의 진행과 변화를 일으키는 해도 없을 뿐 아니라, 계절의 시작을 알리면서 크기를 달리하는 달도 없을 것이다.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달은 물론 작열하는 태양도 없으며, 회전하는 곰자리 별도 없으며 떠오르는 오리온자리 별도 없으며, 유리하는 수많은 별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은 여행하기에 힘이 들지 않을 것이며, 낙원의 뜰을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보행자들이 그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든 바다의 무서운 파도 소리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비록 바다에 물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의인들은 쉽게 바다 위를 걷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 찬 배를 향해 예수가 물 위를 걸어서 다가왔다. 제자들은 처음에 "유령이다"라고 소리쳤다. [중앙포토]

제자들이 찬 배를 향해 예수가 물 위를 걸어서 다가왔다. 제자들은 처음에 "유령이다"라고 소리쳤다. [중앙포토]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2000년 전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의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의 설교를 향해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유대인들도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식으로 받아들였던 ‘천국의 풍경’, ‘천국의 사람’은 이런 식이었다.

2000년 전에는 항해가 지금보다 현저히 위험하지 않았을까. 바다의 파도는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얼마나 무서우면 그랬을까. 당시 유대인들은 천국의 바다에는 파도가 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파도로 인해 목숨을 잃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천국에 사는 의인들은 바다 위를 쉽게 걷는다고 여겼다. 그러니 2000년 전 유대인의 상식에 의하면, 천국 사람은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했다. 하늘나라 사람은 물 위를 걷는 이들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신의 아들이다. 그러니 천국 사람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대인의 상식에는 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바다 위를 걸어야 했다. 그러니 예수도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유대인들이 그런 기대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자 천국 사람임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몸소 바다 위를 걸었을까.

2000년 전 유대인들은 천국 사람이라면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고 믿었다. [중앙포토]

2000년 전 유대인들은 천국 사람이라면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고 믿었다. [중앙포토]

마태오(마태) 복음서의 ‘물 위를 걷는 예수’ 일화에서 마지막 구절이 눈길을 끈다.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려 예수에게 절을 했다. 그러고는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마태오 복음서 14장 33절)

왜 그랬을까. 예수가 물 위를 걸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이 품고 있던 ‘천국 사람은 물 위를 걷는다’라는 상식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그래도 ‘물 위를 걷는 예수’에 대한 논란은 멈추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실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천국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비유를 끌어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물 위를 걷는 예수’ 일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 일화가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물음을 뚫을 때 비로소 ‘물 위를 걷는 예수’가 우리 안에서 되살아난다.

갈릴래아의 밤바다는 캄캄했다. 요즘도 갈릴래아 호수에는 종종 돌풍이 분다. 우리 삶은 바다다. 그것도 거친 바다다. 예고 없이 돌풍이 몰아쳐 배가 뒤집히고 수시로 물에 빠진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다. ‘에고의 배’를 타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도 예수는 ‘물 위를 걷는 법’을 일러준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

베드로처럼 우선 ‘에고의 배’에서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에고의 운전대’에서 손을 떼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렵지만은 않다. 나의 고집을 한 번 꺾고, 나의 집착을 한 번 내려놓으면 된다. 그 순간 나의 손이 운전대에서 떨어진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를 향해 나아가던 베드로는 멀리서 불어오는 돌풍을 보자 그만 두려워져 바다에 쑥 빠져버렸다. [중앙포토]

물 위를 걸어서 예수를 향해 나아가던 베드로는 멀리서 불어오는 돌풍을 보자 그만 두려워져 바다에 쑥 빠져버렸다. [중앙포토]

그다음에는 어찌해야 할까.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에 탄 사람처럼 ‘우주의 운전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심히 지켜보면 된다. 그러면 깨닫게 된다. 에고의 운전보다 우주의 운전을 따르는 것이 훨씬 여유롭고 지혜롭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바로 물 위를 걷는 일이다.

그럼 베드로는 왜 물 위를 걷지 못했을까. 집착 때문이다. 돌풍을 보고 물에 빠져 죽을까 봐 자신을 강하게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런 방식으로는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다. 집착을 내려놓고 물 위를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향해 나아간다.

베드로는 단순히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어 성서를 보면 문장이 더욱 명확하다. 베드로는 “제가 물 위를 걸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라고 명령하십시오(Order me to come toward you on the waters).”라고 말했다. 그러니 ‘물 위를 걷는 일’이 목표가 아니다. ‘예수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목표다. 그렇게 나아가는 방식이 ‘물 위를 걷는 일’이다.

물 위를 걷는 예수와 베드로는 인생이라는 물 위를 걸어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걸까. [중앙포토]

물 위를 걷는 예수와 베드로는 인생이라는 물 위를 걸어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걸까. [중앙포토]

베드로를 향해, 우리를 향해 예수는 지금도 말한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영어로는 “Scant of faith, why do you hesitate?”이다. “약한 믿음이여! 왜 망설이는가?” 무엇에 대한 약한 믿음일까. 그렇다. ‘우주의 운전대’에 대한 약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약해질 때 우리는 자꾸만 망설인다. 애써 놓았던 ‘에고의 운전대’를 향해 자꾸만 손이 간다.

그때마다 예수가 묻는다. “너는 왜 망설이는가(why do you hesitate)?”

〈시즌1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백성호의 예수뎐-시즌2’는 9월 말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짧은 생각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대의 제사장이자,
군대의 사령관이었으며
학자이자 역사가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부하들과 함께 성을 지키며
로마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로마군의 강력한 전력에 밀린
유대인들은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결국 자결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둘씩 짝지어 제비를 뽑아
한 명이 상대를 죽이고.
다시 짝을 지어 제비를 뽑고
또 한 명이 상대를 죽이는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안의 유대인 병사는
계속 죽어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요세푸스와 병사 한 명만
남았습니다.
제비를 뽑아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 남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참이었습니다.

그때 요세푸스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부하 병사를 설득해 함께 로마군에
투항하고 맙니다.
자신의 조국을 배신한 겁니다.

전쟁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로마로 건너갔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눈에 들어
로마 시민이 됐습니다.
당시 새로 로마 시민이 된 사람들은
황제 가문의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자신의 성씨로 삼았습니다.
요세푸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역사서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는 저자 이름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로
남아 있습니다.

오세푸스는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도
모두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유대인에게는 변절자였지만,
요세푸스가 남긴 역사서는
아주 값진 가치가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남긴 역사적 기록은
신약성경의 ‘4복음서’와 요세푸스의
역사서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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