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올해 2월 22일 영국 패션 브랜드 JW 앤더슨 측은 자사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와의 협업을 예고했다. 이들이 공개한 사진에는 주인공 하니의 얼굴이 프린트된 가방과 함께 “2022년 FW(가을·겨울) 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글과 해시태그(#runhany)가 달렸다.
1985년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되다 1988년 KBS 2TV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달려라 하니’는 가수 이선희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불렀던 주제가로도 기억이 생생한 명작이다.
JW 앤더슨과의 협업 발표 후 원작자인 이진주 만화가는 한 만화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하니가 해외에 널리 알려져 한국의 만화·캐릭터·애니메이션이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했다. JW 앤더슨 측과 꾸준히 의견과 시안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 작가가 요구한 첫 번째 조건도 “동양인 캐릭터이니 머리카락 색은 검은색과 짙은 갈색만 써 달라”였다고 한다. 한국 토종 캐릭터의 정체성을 살려달라는 얘기다.
JW 앤더슨은 영국의 젊은 디자이너 조나단 앤더슨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 운영하는 브랜드다. 앤더슨은 2013년부터 스페인 가죽명가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겸하고 있는데, 만화 캐릭터와의 협업은 로에베에서 먼저 시작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일본 애니메이션 명가 지브리 스튜디오가 만든 명작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여러 캐릭터를 반영한 한정판 제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런 독특한 감각을 소유한 디자이너 앤더슨이 한국의 까만 머리 캐릭터 ‘하니’를 눈여겨보고 새로운 협업 제품들을 내놓는다니 국내 패션계와 소비자들의 마음은 설렐 수밖에 없다.
재미·위트 있는 ‘친근한 럭셔리’ 이미지
최근 몇 년 사이 패션 업계의 큰 흐름 중 하나가 바로 ‘유명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와의 협업’이다. 이는 해당 캐릭터를 주요 디자인 요소로 활용해 의류·액세서리 등에 등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구찌는 일본 만화 ‘도라에몽’ ‘원피스’ 속 주인공과 미국 월트디즈니사의 간판 캐릭터 ‘미키 마우스’를 이용한 한정판을 선보이며 화제성·상업성 모두에서 성공했다. 발렌시아가는 미국의 TV만화 ‘심슨가족’의 캐릭터를, 코치는 일본 만화 ‘나루토’의 캐릭터를 활용한 제품들을 내놓았다. 이 외에도 리바이스는 ‘심슨가족’ ‘미니언즈’, 컨버스는 ‘포켓몬’, 언더커버는 ‘에반게리온’ 시리즈와 협업한 제품들을 제작해 화제가 됐다. 대부분 1980~90년대 사랑받았던 만화·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다.
국내 브랜드들도 예외는 아니다. 헤지스는 ‘패딩턴 베어’, 럭키 마르쉐는 월트디즈니사의 개구리 캐릭터 ‘머펫쇼’, 나이스고스트클럽은 ‘꼬마유령 캐스퍼’ 캐틱터들과 협업했다. 특히 국내 패션 브랜드들에선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카카오프렌즈, 라인프렌즈, BT21, 펭수 등의 캐릭터들을 적극 활용한 협업이 많다.
이들 협업 제품의 가격은 한 개에 몇 만원에서 몇 백만원을 훌쩍 넘지만 반응은 뜨겁다. 일단 주요 소비층인 30~40대 밀레니얼 세대에 익숙한 1980~90년대 캐릭터들의 귀여운 모습이 눈길을 끄는 데다 대부분의 협업 컬렉션은 단발성으로 소수의 개수만 제작된다. 매장 앞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희소가치 높은 한정판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게 MZ세대의 특성이다.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개성을 뽐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전미영 연구위원은 “현재 20~30대인 Z세대는 엄마들이 좋아했던 올드하고 고전적인 분위기의 럭셔리 브랜드보다 가볍고 힙한 럭셔리 브랜드를 선호한다”며 “친숙한 만화 캐릭터들이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해보면 MZ세대는 ‘나 럭셔리’라고 힘을 주기보다 적당히 힘을 빼고 재미와 위트를 제공하는 유연한 럭셔리를 선호한다. 전 연구위원은 “MZ세대는 ‘이런 비싸고 우아한 브랜드가 귀엽고 만만한 캐릭터들과도 소통한다’는 점을 재밌고 쿨하게 여긴다”고 덧붙였다.
이는 럭셔리 브랜드와 만화 캐릭터 협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루이비통과 일본인 예술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협업을 예로 들 수 있다. 2003년 당시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마크 제이콥스는 무라카미가 그린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탄탄보’와의 협업을 제안했고, 무라카미는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브라운+베이지’ 모노그램에 탄탄보의 화려한 색감을 더해 ‘멀티컬러 모노그램’을 탄생시켰다. 덕분에 무겁고 점잖기만 했던 루이비통은 사랑스럽고 에너지 넘치는 젊은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다.
캐릭터와의 협업은 만화·캐릭터·애니메이션 마니아를 새로운 소비자로 확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대부분 새로운 협업 프로젝트가 발표되면 매장 인테리어까지 캐릭터와 관련된 것들로 장식돼서 작은 캐릭터 랜드가 탄생한다. 해당 캐릭터 마니아들로선 기꺼이 공간을 찾아갈 욕심이 난다. 이는 MZ세대가 좋아하는 ‘공간 경험 마케팅’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캐릭터 기존 이미지 깨는 파격도 가능
뉴욕대학교 스턴 경영대학원의 럭셔리 마케팅 교수 토마이 세다리는 “한정판 컬렉션을 통해 럭셔리 브랜드들은 장기적인 약속 없이 제품을 실험해볼 수 있다”고 했다. 패션 브랜드들이 캐릭터 협업에 적극적인 이유도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 영감과 창의성을 얻어 ‘혁신적인 실험과 도전’을 할 수 있고, 더불어 새로운 이슈 창출까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3일부터 6월 7일까지 국내 골프 브랜드 왁은 자사 캐릭터 ‘와키’와 일본 산리오사의 대표 캐릭터 ‘헬로 키티’가 협업한 제품을 소개하는 임시 매장을 운영했다. ‘와키’는 상대의 집중력을 흐리게 할 만큼 귀여운 악동 캐릭터라는 게 콘셉트인데, 이번 협업으로 ‘헬로 키티’의 상징인 빨간 리본까지 머리에 달면서 한층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졌다. 왁의 이준흠 사업부장은 “이미 개성이 확실한 캐릭터와 캐릭터의 만남이라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시작했다”며 “재작년 일본에 진출한 왁이 현지 고객들과 더 친숙해질 기회라고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번 협업은 산리오사가 먼저 제안했다. 그동안 캐릭터 라이선스 사업을 잘 해온 기업이지만 성인 패션 브랜드, 특히 골프 브랜드로의 확장은 산리오사에게도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특히 1974년 첫 선을 보인 캐릭터이니 ‘헬로 키티’의 나이는 48살. 6살짜리 와키를 만나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캐릭터를 빌려오되, 그대로 원본 캐릭터를 ‘복붙(복사해서 붙인다는 의미의 신조어)’ 프린트하지 않고 브랜드만의 독특한 해석으로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경우도 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의 남성복 송지오 옴므와 자사 캐주얼 브랜드인 지제로는 2년 전부터 ‘곰돌이푸’ ‘미키 마우스’ ‘토이 스토리’ ‘스누피’ 등의 캐릭터와 협업해왔고, 송지오의 섬세한 장인정신에 맞게 자수를 놓거나, 검정색 실을 이용해 이미지를 어둡게 재창조하면서 ‘완판’ ‘6차 재주문’ 등의 기록을 세웠다.
코오롱FnC의 남성복 커스텀 멜로우가 온라인 유통 제품으로 2020년 선보인 브랜드 새드 스마일은 유명 만화 캐릭터를 빌려오지 않고 브랜드 캐릭터를 자체 개발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런데 웃는 모습으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스마일’이 아니라 울고 있는 ‘새드 스마일’이다. 코오롱FnC 캐주얼 사업부 손형오 상무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현대인이 느끼는 감정은 복잡해졌다”며 “웃픈(웃기지만 슬픈) 상황이 반복되는 현대인과 공감대를 갖기 위해 ‘새드(sad·슬픈)’와 ‘스마일(smile·웃음)’ 상반된 두 단어를 묶어 복잡한 감정을 위트 있게 풀어냈다”고 소개했다. 그는 “캐릭터를 이용한 패션 디자인이 늘고 있는 것은 요즘 젊은 세대의 SNS 소통 때문이기도 하다”며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패션 감각과 취향을 판단할 때 옷에 익숙한 캐릭터가 들어 있으면 눈에 잘 띄고 호감이 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