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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한·미 통화스와프 컬트(Cult)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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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남태평양 일부 섬에서 기이한 풍습이 생겼다. 원주민들이 전시 미군 기지를 흉내 내 어설픈 활주로와 격납고·관제탑을 만들고 나무 소총을 들고 순찰까지 돌았다. 그리하면 보급품을 가득 실은 비행기들이 다시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원주민들은 미군으로부터 얻는 진귀한 물건을 조상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여겼고 다시 그 시절이 오는 지상낙원을 꿈꿨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화물 숭배 현상을 ‘카고 컬트(Cargo Cult)’라고 불렀다.

남태평양 원주민 ‘카고컬트’ 연상 #지나친 기대는 과잉홍보의 업보 #기초체력 튼튼히 하는 게 할 일

요즘 한국 사회에서 한·미 통화스와프가 거론되고 소비되는 방식도 컬트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원주민처럼, 우리만의 기대와 소원을 담아 경제의 만병통치약인양 통화스와프를 간절히 희구한다.

한국은행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와 체결한 한시적 통화스와프 계약이 예정대로 지난해 12월 31일 끝났다. 지난해 12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방지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와 체결한 한시적 통화스와프 계약이 예정대로 지난해 12월 31일 끝났다. 지난해 12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방지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2008년 시장 불안을 잠재웠던 강력한 한 방, 한·미 통화스와프의 추억을 왜 모르겠나. 당시 통화스와프 소식에 하루 만에 원화가치는 177원 뛰었고 주가도 12%나 치솟았다. 2020년에도 통화스와프 체결 다음날 원화가치는 39원 올랐고 주가는 7% 뛰었다. 통화스와프는 외환보유액, 외환 거시건전성 3종세트와 함께 외환시장 충격을 줄이는 방파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후일담도 알 필요가 있다. 2008년 화려했던 통화스와프 한 방의 효과는 사실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원화가치는 슬금슬금 떨어져 20여일 뒤엔 예전 수준인 1200원대 중반으로 되돌아갔고, 2009년 7월 1300원대까지 떨어졌다. 통화스와프가 비상시 응급조치는 될 수 있어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얘기다. 환율은 결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반영해 결정되는 가격변수다.

다음 주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방한한다니 ‘혹시나’하고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그제 기자간담회에서 통화스와프 얘기를 했다. 통화스와프는 한·미 양자 간의 문제라기보다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가 글로벌 금융시장이 흔들릴 때 세계적 시각으로 판단해서 하는 것이란 설명이 핵심이었다. 양자 협상을 잘한다고 해결될 일 아니라는 얘기다. 지금이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는 다르다는 말도 했다. 유로나 엔처럼 연준과의 상설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통화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통화스와프를 열망하는 정치권과 여론의 오버슈팅을 경계하는 듯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 의장은 며칠 전 이런 말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이명박 정부와 미국의 사이가 굉장히 좋아 한·미 통화스와프를 맺게 된 건데,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 한·미 관계가 나쁘니까 종료가 됐다. 국가적 손실이다.”  틀린 말이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사태 때 한국·브라질·멕시코·싱가포르 등 신흥국을 포함해 9개국과 거의 동시에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고 종료도 동시에 했다. 상설 통화스와프 체결 5곳을 합하면 총 14개국이다.

연준은 어떤 기준으로 신흥국을 골랐을까. 한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기 직전인 2008년 10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을 보면 한국 등 4개국을 선택한 이유가 나온다. ‘경제와 금융의 비중이 크다. 4개국 중 한두 나라에서 더 문제가 생기면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에 반갑지 않은 전염효과(spill over)를 야기할 수 있다. 이들 나라는 모두 거시정책을 건전하게 운영하고 있어 경상수지나 재정 상태가 좋다. 현재 달러 가뭄에 시달리고 있어 연준이 도와주면 효과가 있다.’ 한 마디로 통화스와프를 해줄 만한 신흥국 선두국가이고, 안 하면 미국도 피해를 볼 수 있으며, 위기를 겪고 있어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면 즉각 효과가 나올 수 있는 나라여서 체결했다는 거다.

통화스와프 상설화 주장은 너무 나갔다. 미국은 달러 동맥경화를 막기 위해 유동성 중심국과 상설 스와프를 맺었다. 달러를 굴리는 대형 글로벌 금융기관이 많고 자국 통화가 국제화된 나라들이다. 한국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냉정한 현실이다.

통화스와프에 대한 국내의 과도한 관심에 기재부와 한은이 무척 부담스러운 눈치다. 과거 통화스와프 체결의 성과를 과잉 홍보한 업보이기도 하다. 누구누구의 미국 인맥이 통했다는 둥 미담이 쏟아졌고 통화스와프 환상을 너무 키웠다.

통화스와프 체결하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위기 때 순발력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평상시 연준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거시지표를 잘 관리해야 한다. 좋은 음식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게 건강 비결 아닌가. 건강보조식품에만 너무 의존하지 말자. 경제 기초체력을 잘 관리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