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병주의 시선

“위헌이면 위헌, 합헌이면 합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24년 6개월 만의 빅매치다.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국민의 권리와 그 침해 여부를 판단해줘야 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한정위헌’ 법률에 대한 해석 다툼을 본격화했다. 헌재는 대법원의 재판을 직권으로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고,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공개 반박 자료를 냈다. 헌재의 대법 재판 직권 취소는 1997년 12월 이후 헌장 사상 두 번째다.

표면상 포문은 헌재가 먼저 열었다. 지난달 30일 N씨가 제주도 통합영향평가심의위원회 민간위원을 지내면서 뇌물을 수수한 혐의에 대해 위촉심의위원을 ‘공무원’에 준하는 신분으로 처벌한 대법원 판단과 관련해 대법원 재판 자체를 취소하는 고강도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판결 받은 N씨가 다시 재판을 받게 되면 그보다 형량이 낮아질 가능성이 열린 결정이다.

24년 6개월만, 대법 판결 무효 결정 

대법원은 6일 만에 공식 반박 입장을 냈다.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 헌법 제27조 및 ‘사법권의 독립과 심급제도’를 규정한 헌법 제101조를 근거로 들었다. “헌법상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단에 대하여 법원 외부의 기관이 그 재판의 당부를 다시 심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면 3심제를 원칙으로 하는 헌법과 달리 4심제가 된다는 우려가 담겼다. 여기에 덧붙여 헌법재판소법도 도마에 올렸다.  “헌법재판소가 법률 조항 자체는 그대로 둔 채 그 조항에 관한 특정한 내용의 해석ㆍ적용만을 위헌으로 선언하는 이른바 한정위헌 결정에 관하여는 헌법재판소법 제47조가 규정하는 위헌 결정의 효력을 부여할 수 없다”고 했다. 헌재는 “헌재가 법률의 위헌성 심사를 하면서 합헌적 법률해석을 하고 그 결과로 이뤄지는 한정위헌 결정도 일부 위헌 결정으로, 헌재가 헌법에서 부여받은 위헌심사권을 행사한 결과인 법률에 대한 위헌 결정에 해당한다”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소원 및 위헌법률심판 선고를 위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 뉴스1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소원 및 위헌법률심판 선고를 위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 뉴스1

한정위헌 놓고 사법기관 간 권한 다툼

이처럼 법률조항의 해석을 놓고 한정위헌 결정 충돌이 다시 일어난 만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해당 법률조항의 구체화다. 이런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됐다. 일례로 국회입법조사처는 2009년 4월 ‘헌법재판소 변형 결정의 기속력에 관한 입법 개선방향’ 보고서에서 헌법재판소법 47조와 더불어 ‘헌법재판소는 제청된 법률 또는 법률 조항의 위헌 여부만을 결정한다’고 규정한 제45조를 함께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정위헌, 헌법불합치, 한정합헌 등 변형 결정의 유형을 법률에 명확히 해 혼란을 없애자는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법률에 구체화하면 헌법재판의 경직성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현행 법률을 그대로 두면서 판례를 통해 발전되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는 보충의견을 냈다. 하지만 이번 대립으로 희망 섞인 보충의견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사라진 형국이다.

헌법재판소법에 명문 없는 변형결정 문제 

아예 변형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1987년 개정헌법에 근거해 이듬해 설립된 헌재는 초반에는 위헌ㆍ합헌 결정만 내리다 1991년부터 한정위헌 등 변형 결정을 도입했다. 헌법이나 법률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우리법이 독일법 체계에 기반을 둔 만큼 독일처럼 이런 형태의 결정도 합당하다는 취지였다. 이를 두고 헌재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기본권 보호를 강조하고 소수의견을 많이 내 ‘미스터 소수의견’으로 불렸던 고 변정수(1988∼94년 재임) 재판관은 “헌재가 위헌이면 위헌, 합헌이면 합헌이라고 명확하게 결정해야지 변형 결정을 남발하면 결국 헌재와 헌법의 권위만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견을 개진한 『위헌이면 違憲(위헌), 합헌이면 合憲(합헌)』(1998)이라는 소수의견집을 내기도 했다. 5년 동안 변 재판관실의 재판연구관을 지낸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변 재판관의 소신처럼만 헌재가 결정을 내려왔다면 대법원과의 갈등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모습. 뉴스1

서울 서초동 대법원 모습. 뉴스1

헌법재판소법 개정 작업 논의해야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한다. 1997년 이길범 전 신민당 의원의 세금소송을 놓고 벌어진 헌재의 대법원 재판 첫 취소 사태는 국세청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다시 산출하고, 이 전 의원이 소를 취소하면서 자동 해소됐다. 하지만 이번엔 N씨에게 내려진 징역 2년형 선고에 대해 형량을 조정해줄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가 헌재의 결정을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해봐야 법원은 이를 무시할 것이고, 또다시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상황이 예고돼 있다. 소송비용에 부담을 느낀 당사자가 소송을 더는 내지 않으면 다행이라 기대하는 것일까.

기관 권한만 앞세우지 말고 헌재든, 대법원이든, 국회든 이왕 다시 터진 불완전한 사법 구조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시켜 국민 권리 구제에 나서야 한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