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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잘못 저질렀는데, 이혼청구 허용했다…대법의 예외 근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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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상대가 관계 회복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말’로만 이혼을 거부한다면, 결혼 생활이 어긋난데 책임이 있는 배우자여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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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유책주의’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한 제도) 아래에서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기준과 상대 배우자의 혼인 계속 의사를 판단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대법원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은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이혼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가정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남편 A씨와 아내 B씨는 지난 2010년 3월 결혼을 하고 같은 해 12월 딸을 낳았다. 두 사람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면서 부부 상담까지 받았지만 갈등은 계속됐다. A씨는 이혼 소송을 준비했다가 아내의 사과로 그만뒀지만 결국 2016년 집을 나가 다시 이혼 소송을 냈다. 아내 B씨는 이혼에 반대했고 법원은 “A씨가 잘못(귀책사유)이 있다”며 이혼 청구를 기각했다.

그 이후에도 A씨는 집과 결혼 생활로도 돌아가지 않고 별거를 지속했다. 다만 그는 매달 50만원씩 양육비를 지급했고, 딸과 아내가 살고 있는 자신 명의의 아파트 담보 대출금도 갚아왔다.

A씨가 딸에게 연락하려고 하면, B씨는 자신을 통해서 하라며 먼저 집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했다. 반면 A씨는 관계 개선이 먼저라는 입장이라 두 사람의 간극은 계속 메워지지 않았다. 결국 A씨는 2019년 9월 2번째 이혼 소송을 냈고, B씨는 이번에도 이혼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가정법원은 A씨의 이혼 청구를 기각했고 항소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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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법원은 A씨의 상고를 심리한 뒤 이혼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심이 이혼을 거부하고 있는 아내의 ‘혼인 계속의 의사’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고 봤다. 결혼 생활의 모든 과정과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중에 드러난 아내의 말과 행동·태도, 아내와 아이가 처한 상황, 이 결혼의 회복 가능성 등을 모두 고려하여 혼인 계속 의사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부부는 정신적·육체적·경제적으로 결합된 공동체로서 서로 협조하고 보호하며 부부 공동생활로서의 혼인이 유지되도록 포괄적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민법 제826조 제1항)가 있다는 측면에서다.

대법원은 또 “남편이 자녀에 대한 면접 교섭의 의지가 있고 양육비를 꾸준히 지급해 오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같은 정황들이 아내와 자녀에 대한 보호와 배려로써 유책 배우자의 유책성이 희석되었다고 볼 수 있는 지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미성년자인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부모 사이에서 갈등과 분쟁, 이혼 소송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왔는데 과연 그러한 혼인 관계의 유지가 자녀의 정서적 상태와 복리를 저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살펴봐야 한다고 짚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의 의미에 대해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경우와 허용할 수 없는 경우의 판단 기준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라며 “상대방 배우자의 혼인 계속 의사’의 판단 기준 및 판단 방법을 처음으로 구체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행 유책주의에서는 외도⋅폭행 등 상대방의 잘못으로 이혼을 청구한 경우 이혼 판결이 나는 게 원칙이고,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는 이혼 소송을 제기해도 이길 수 없다(민법 제840조 제6호). 이는 가부장적 질서가 팽배하던 1965년 남편이나 시댁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죄 없는 부인을 내쫓는 ‘축출 이혼’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다만 혼인생활이 이미 깨진 뒤 상대방 역시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음이 명백한데도 복수심이나 오기로 상대방을 묶어두려는 경우라면 예외적으로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도 허용해 왔다.

한 부장판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파탄주의(혼인관계가 사실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파탄났다면 어느 배우자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이혼을 허용하는 제도)로 가는 신호탄이 아니라 유책주의 아래에서 그 판단 방법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의미”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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