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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재련이 고발한다

중국 가짜약과 100만원 시술비로, 언제까지 여성들 울릴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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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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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2021년)에 따르면 50세 미만 임신 경험 여성 중 17.2%가 임신중절을 한 적이 있다. 배경은 낙태죄 공식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 그래픽=신재민 기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2021년)에 따르면 50세 미만 임신 경험 여성 중 17.2%가 임신중절을 한 적이 있다. 배경은 낙태죄 공식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 그래픽=신재민 기자

지난 2019년 4월 한국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자기 낙태죄와 의사에 의한 촉탁 낙태죄 모두 ‘여성의 임신유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20년 12월 31일까지 위헌적 요소를 배제한 새 법을 만들도록 입법 시한을 정했고, 그 기간 안에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 2021년 1월 1일부터 낙태죄 조항은 효력을 상실한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낙태죄 대체 입법은 헌재 결정으로부터 3년이 지난 2022년 7월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형법에는 ‘부녀가 약물 등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는 규정이 존재한다. 사문화된 규정을 몇 년째 그대로 방치한 것은 입법자들의 직무유기다.

중앙일보 '그림 사설'의 한 장면.

중앙일보 '그림 사설'의 한 장면.

보험 적용 안 돼 100만원 넘는 시술 

이런 입법 공백은 여성에게 고통을 준다(여성 혼자 벌인 일이 아님에도 임신중지와 관련한 어려움은 대개 여성의 몫이다). 위헌 결정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낙태죄 규정 탓에 어떤 의사들은 임신중절 시술에 나서지 않는다. 여기저기 문의하고 거절당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적지 않은 여성들이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놓치게 된다. 시술하는 병원을 요행히 찾아도 건강보험 비급여라는 장벽에 좌절하는 경우도 있다. 100만원을 넘는 비용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크다.

강간 피해로 임신했을 땐 그나마 현행 모자보건법에 의해 중절 시술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적잖은 문제가 있다. 일단 법상의 임신중절 허용 사유가 매우 제한적이라 판단이 쉽지 않다. 가령 성매매로 인한 임신이나 청소년 간 성관계로 인한 임신은 허용되는 걸까, 아닐까. 만약 판단을 한다면 누가 어떤 절차로 하는 것인지 법령상 명확하지 않다. 이 때문에 시술의 적기를 놓쳐 건강권의 위협을 받기도 한다. 무슨 사유로 임신을 했든지 간에 임신을 유지하기 어렵다면 신속히 판단해 시술하는 게 여성 건강에 좋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낙태죄 처벌조항에 맞서 싸워온 덕분에 2012년(낙태죄 합헌)과 달리 2019년엔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임신중지 권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고 천명했다. 그런데 국회의원 300명은 3년 넘게 시간을 허비해 절박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외면하고 있다.

미 대법 판결 후 국내도 후퇴할까 우려

국내에서 낙태죄 대체입법이 잠자는 와중인 지난 6월 24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낙태를 처벌하는 미시시피주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지난 1973년 24주 이내 태아에 대해 여성의 임신중지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했던 기념비적인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사실상 폐기한 것이다. 쉽게 말해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는 이젠 미국 헌법에 의해 보호되는 권리가 아니라는 취지다. 해당 판결은 미국 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 역시 보수 성향의 미 연방대법관들에 의한 정치적 판결이 역사의 시계추를 50여 년 전으로 돌려버렸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임신중절 불법화 반대 시위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임신중절 불법화 반대 시위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국회입법조사처 자료(2019년 5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관련 쟁점 및 입법과제)를 보면 20세기 말 기준 전 세계 국가 중 63%가 여성의 신체 건강을 위해, 62%는 여성의 정신 건강 유지를 위해, 33%는 사회·경제적 사정을 이유로, 또 27%는 임부 요청에 따라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아무리 미 연방대법원이 시대에 뒤떨어진 판결을 했어도 세계적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각에서는 미 연방대법원 판결이 미국 내 각 주는 물론이거니와 국내의 낙태죄 대체 입법 과정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2019년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낙태죄의 위헌적 요소에 대해 상세히 밝혔던 걸 보면 이런 우려는 현실화하지 않을 거로 본다. 오히려 퇴보적인 미국 판결이 지지부진한 국내 낙태죄 대체 입법 현황을 환기해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사후피임약 규제라도 풀어야

여러 실태조사와 통계를 보면 낙태죄는 이미 사문화됐다. 그런 사문화한 형벌 조항의 존치로 인해 매년 최소 수만 명의 여성이 임신중지와 관련한 의료접근권에 제약을 받고 있다. 또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분명한 의료행위인데도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특히 임신중지약 사용을 억제하는 규제가 문제다. (사전) 피임약은 일반 의약품이라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지만, 성관계 직후 72시간 안에 먹는 응급피임약과 해외에서 시판되는 미프진처럼 통상 10주 이내에 먹는 임시중지약 등은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있거나 아예 국내에 정식 수입이 안 돼 구매가 어렵다. 초기에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을 기회를 국가가 불합리한 규제를 통해 막고 있다는 여성계의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의사 처방 없이 사후피임약 구매를 자유롭게 허용하면 오남용으로 인한 건강권 침해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헌재가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를 인정한 이상 오남용 우려를 이유로 사후피임약 구매를 제한하는 건 정책적 재고가 필요하다.

지난달 인천세관이 압수한 중국산 임신중절 약. 밀수 조직이 옷 주머니 등에 숨겨 들여온 뒤 미국산으로 포장을 바꿔 SNS를 통해 팔았다. 이 약은 부작용 때문에 국내에서 판매가 금지돼 있다. [사진 인천세관]

지난달 인천세관이 압수한 중국산 임신중절 약. 밀수 조직이 옷 주머니 등에 숨겨 들여온 뒤 미국산으로 포장을 바꿔 SNS를 통해 팔았다. 이 약은 부작용 때문에 국내에서 판매가 금지돼 있다. [사진 인천세관]

태아 생명 보호를 위해 낙태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 말 자체가 여성을 출산 도구로 보는 것이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가 중요하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지만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을 처벌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달성해서는 안 된다. 존엄한 삶의 주체인 여성의 권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유보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비혼 가정 양육자 및 아동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지원 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낙태는 범죄’라고 여성들을 상대로 겁을 줘 원치 않는 출산을 강요하는 것으로는 태아의 생명권을 지속적으로 보호할 수 없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그 태아를 임신한 여성에 대한 보호는 불가분의 관계다.

비혼 가정 출산 지원책도 필요

대체 입법에서는 낙태죄 폐지에 더해 응급피임약 구매, 임신중절 시술시 건강보험 적용, 의사의 임신중절 시술 거부권 문제 등등에 관한 내용이 꼼꼼히 담겨야 한다. 더 나아가 비혼 가정을 포함해 숙고 끝에 처음엔 원치 않았던 임신을 유지하기로 선택한 여성들과 그 아이들을 위한 적극적 출산 지원 정책 및 양육 지원 정책도 구체화해야 한다.

이처럼 임신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보호 장치가 촘촘해진다면 여성이 임신 유지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정할 용기를 얻지 않을까. 처벌이 아닌 자기결정권 존중과 지원이 태아 생명의 보호로 이어지는 가장 현명한 방안이다. 헌법 수호 기관이 이미 이를 인정하고 확인했다. 남은 건 국회가 좋은 새 법을 만드는 일이다. 21대 의원들이여, 제발 일 좀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