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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얼굴 기어다녀도 참더라…北의 희한한 카리스마 과시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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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에 앞장섰으나 버림받은 인물  

1989년 9월 초, 소련의 민스크에 거주하던 74세의 이상조(李相朝, 1915~1996)가 57년 만에 고향 부산을 방문했다. 당시 언론 매체에선 그의 동정을 연일 비중 있게 보도했다. 당시는 1년 전 열렸던 서울올림픽에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동구권과의 교류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에서 개인 자격으로 한국을 찾아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1989년 방한 당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 회견하는 이상조. e영상역사관

1989년 방한 당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 회견하는 이상조. e영상역사관

그런데 단지 그가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불가촉 국가였던 소련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이슈가 됐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우리에게는 한편으로 원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산을 떠난 것은 57년 전이었지만, 1955년 소련 주재 북한대사로 부임한 뒤 귀국하지 않았으므로 한반도를 떠난 것은 34년 전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북한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상조는 1932년에 중국으로 건너간 후 공산주의 계열 항일 단체인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했다. 이후 예하 무력 조직인 조선의용군에 속해 일본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거나 팔로군을 도와서 국공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와 대한민국의 관계가 악연으로 바뀐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연안파의 일원으로 귀국한 후 조선 노동당 조직부부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개인이 신봉하는 사상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북한군 정찰국장, 부총참모장을 역임하며 동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데 앞장섰다. 휴전 회담에선 공산군 측 차석대표로 활약했다. 그렇게 북한의 핵심으로 활약하다가 1955년 소련 대사로 가게 됐다. 이듬해 벌어진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를 비롯한 반 김일성 세력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자 현지에 망명했다.

조선의용군 활동 당시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되는 이상조 사진. 위키미디어

조선의용군 활동 당시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되는 이상조 사진. 위키미디어

당시 반대파들이 당시 소련 최고 권력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의 영향으로 김일성 개인 숭배를 비판하다가 피를 본 것이어서 소련 망명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상조는 이후 반 김일성 운동을 벌였다. 이때부터 그는 북한에서는 눈엣가시인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에 깊숙이 참여했고 6ㆍ25 전쟁 중 나쁜 쪽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데다 공산주의자를 신봉했기에 우리에게도 결코 달가운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표독스러웠던 이유

이상조는 휴전 회담 당시에 못 된 공산주의자의 표본으로 불릴 정도로 표독스럽게 굴어서 당시 유엔군 대표단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당시 공산군 대표단은 북한군 3명(남일, 이상조, 장평산), 중국군 2명(셰팡(解芳), 덩화(鄧華))으로 구성됐다. 수석은 남일이었지만 회담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실세는 셰팡이었다. 북한 측 인사들은 주로 체제 선전을 비롯한 정치 활동에만 전념했다.

1951년 7월 휴전 회담 시작 당시 공산군 측 대표단. 왼쪽부터 셰팡, 덩화, 남일, 이상조, 장평산.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1951년 7월 휴전 회담 시작 당시 공산군 측 대표단. 왼쪽부터 셰팡, 덩화, 남일, 이상조, 장평산.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그래서 간간이 농담도 하는 중국 대표와 달리 북한 대표들은 마주한 유엔군 대표를 째려보기만 했고 발언권을 얻으면 의제와 상관없는 체제 선전이나 상대방을 욕하며 시간을 끄는 행동을 반복했다. 회담 전략상 일부러 그런 것이었지만,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극렬했다. 지금도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나타나는 북한 정권의 상식 밖 행동을 상기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이다.

그중에서도 이상조가 가장 못되게 굴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회담 도중 마주한 유엔군 측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백선엽 장군에게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는 메모를 보이며 욕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이상조는 악역을 도맡아서 하다 보니 냉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을 잡기 위해 억지로 애를 쓰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파리 사건으로 불리는 유명한 에피소드도 있다.

1990년 두 번째 방한한 이상조(왼쪽)를 만난 백선엽 장군. 비록 함께 자리했지만 휴전 회담 당시의 기억 때문에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중앙포토

1990년 두 번째 방한한 이상조(왼쪽)를 만난 백선엽 장군. 비록 함께 자리했지만 휴전 회담 당시의 기억 때문에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중앙포토

회담 중 파리가 날아와 매서운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던 이상조의 얼굴에 앉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파리가 한참 동안 얼굴을 기어 다녀도 꿈쩍하지 않았다. 손이나 머리를 흔들어 파리를 쫓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도, 참을성이 많고 냉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본 유엔군 측 대표단은 너무 더럽다며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삼았다.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휴전 회담이 무려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이 돼서야 타결될 수 있었던 것은 공산군 측이 휴전 자체보다 이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산군이 공세에 나서면 회담을 거부하거나 연기하고 반대로 유엔군이 반격하면 회담을 이용해 시간을 버는 행위를 반복하고는 했다. 이상조가 그런 악역의 대표 주자였으니 반 김일성주의 망명자라도 우리 기억 속에 나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 회담 당시의 이상조. 나중에 서울에 와서 증언을 남길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1951년 7월 10일 휴전 회담 당시의 이상조. 나중에 서울에 와서 증언을 남길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그래서 당시 그의 방한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던 것은 당연했다. 비록 전쟁 중 행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지만, 그는 북한 정권 수립, 남침, 권력 투쟁에 있었던 많은 사실을 증언했다. 직전까지 그가 대한민국을 찾아와 역사적인 증언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상조 본인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2년 후 소련이 해체될 정도로 국제 역학 관계가 급속히 바뀌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에피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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