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바이든도 빚진셈…쿼드와 인·태, 그 시작은 아베였다 [박현영의 워싱턴살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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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만났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만났다. [AP=연합뉴스]

#1. 2007년 8월 22일 인도 국회의사당.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와 의원, 장관들 앞에서 '두 바다의 교차점(二つの海の交わりㆍConfluence of the Two Seas)'이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 지리적으로 어디에 서 있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1655년 무굴제국 왕자 다라 쉬코가 쓴 책 제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두 바다의 교차점'이 탄생하고 있을 때와 다름없습니다.”

다라 쉬코 왕자는 저서 『두 바다의 교차점』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선 경계를 넘어야 하며, 득도의 궁극적 목표를 형이상학 간 융화에서 찾은 인물이다. 아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태평양과 인도양은 자유와 번영의 바다로서 하나의 역동적인 결합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지리적 경계를 넘은 더 넓은 아시아(broader Asia)가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두 나라는 이를 더욱 확대하고 이 바다가 가장 투명한 바다가 되도록 육성하고 풍요롭게 할 능력과 책임이 있습니다.”

태평양과 인도양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허물어 더 넓은 아시아로 만들자는 ‘인도ㆍ태평양(인태)’ 개념의 탄생이었다.

#2. 2006년 12월 15일 일본 도쿄. 아베 총리는 일본을 방문한 싱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46항은 “두 나라 정상은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인도 및 기타 생각이 같은(like-minded) 나라들이 상호 관심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용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두 정부는 그 방식에 대해 협의할 것”이라고 적었다.

인도ㆍ태평양 지역에서 민주주의 국가 간 대화하고 협력하자는 취지였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인·태 4개국 협력체 ‘쿼드(Quad)’의 시초였다. ‘생각이 같은 나라’로 미국과 호주가 합류했다. 이듬해 5월 마닐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 때 4개국 당국자들이 참여한 첫 쿼드 회의가 열렸다.

트럼프ㆍ바이든 모두 인정한 인ㆍ태와 쿼드  

‘자유롭고 열린 인도ㆍ태평양’과 ‘쿼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을 함축하는 단어다. 트럼프·바이든 두 대통령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사람은 아베 전 총리다.

지향점이 다른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가 아시아 정책만큼은 아베라는 일본 정치인에게 빚을 진 셈이다. 아베가 미국 외교정책에 미친 영향만큼 워싱턴의 아시아 전문가들은 아베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추모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아시아 정책을 담당한 매슈 포틴저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ㆍ태평양’이란 문구를 아베 총리로부터 "빌려왔다(borrow)"고 밝혔다.

포틴저 전 부보좌관은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에서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한 구호를 찾고 있을 때, 나와 동료들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이라는 아베의 모토(motto)를 증폭시키는 것의 장점을 봤다”고 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1월 취임 후 아시아를 처음 방문했다. 베트남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을 선언하는 연설을 했다. 아베의 인도 의회 연설 후 10년이 흐른 뒤였다.

이후 다른 나라 지도자들도 이 지역을 묘사할 때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글로벌 현상이 됐다. 인도네시아가 이끄는 동남아 국가들이 인도·태평양 전망을 발표했다. 벨기에와 독일, 프랑스는 인도·태평양 전략 또는 지침을 공개했다. 프랑스는 자신을 인도·태평양 국가라고 선언했다.

중국 견제에 일찍 눈 뜬 아베

아베가 아시아를 더욱 넓게 봐야 한다며 인도·태평양이란 개념을 제안한 배경에는 중국이 있다. 그전까지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은 ‘아시아·태평양’으로 불렸다.

포틴저 전 부보좌관은 “아베는 ‘아시아·태평양’이란 말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형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이 이 지역의 개념적 중심부에 있는 것보다 화면을 ‘줌 아웃’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젊은 해양국가들을 포함하는, 보다 웅장한 광경을 바라보길 원했다”고 설명했다.

쿼드가 탄생한 배경에도 중국이 있다. 아베는 일본, 인도, 호주, 미국 4개국 협의체인 쿼드를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기 위한, 야구장의 거대한 다이아몬드로 상상했고 인내심을 갖고 몇 년간 틀을 만들어나갔다고 포틴저는 전했다.

인도양과 태평양에 걸친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더욱 넓혀 중국 포위망을 확대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해석이다. 쿼드는 트럼프 행정부 첫해인 2017년 4개국 당국자들이 만나기 시작했고, 트럼프 행정부 말기에 장관급으로 격상됐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상들이 온ㆍ오프라인으로 4차례 만났다.

포틴저는 아베가 세계 리더 가운데 부상하는 중국의 위협을 가장 먼저 인식했다고 평가했다. 포틴저는 “아베는 대부분 서방 지도자들보다 훨씬 전에 중국 공산당의 야심을 이해했다”면서 인·태 개념과 쿼드로 “세계 각국이 아시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 무역 전쟁을 시작한 게 2017년이었다. 아베는 그로부터 10년 전부터 중국의 부상이 일본 등을 위협할 가능성을 내다보고 인·태 전략과 쿼드를 구상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일본 전문가인 마이클 그린 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일본 석좌는 NPR 인터뷰에서 "아베는 일본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모두 채택한 쿼드 정상회의는 아베의 아이디어였다"고 회상했다.

아베는 중국을 지리적 관점에서 견제하는 것 외에 베이징의 권위주의를 상쇄하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포틴저는 전했다. 자유와 법치주의, 시장 경제, 무력과 강요로부터 자유, 번영 등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을 향해, 그리고 동맹을 규합할 때 외치는 가치 역시 아베가 일찌감치 설파했다.

"미국이 쌓은 자유 질서 지켜준 아베"

아베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영감을 줬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치인 자유와 시장 질서를 옹호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미국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그린 전 CSIS 일본 석좌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서 탈퇴했을 때 아베가 미국의 자리에 들어와 협정을 계속 유지하며 미국의 복귀를 촉구했다고 회고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호주의로 회귀를 선언하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유럽 국가들과 싸울 때 아베가 미국과 유럽, 캐나다 정상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린 전 석좌는 “중국과 러시아가 위협하고, 미국의 입지가 약간 불안할 때 아베는 미국이 쌓아 올린 국제 질서와 자유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나섰다"면서 "아베 정부와 함께 일했던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 인사들은 이 점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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