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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문재인 정부가 되살린 국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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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더불어민주당은 국가보안법을 반시대적인 족쇄로 간주한다. 지난해 10월 민형배 의원(현재 무소속)의 대표 발의로 민주당 등 21명 의원이 국가보안법 폐지법률안을 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정권 안보 유지 수단이자 정치적 반대 세력과 의견을 처벌하는 도구로 악용되면서, 수많은 시국 사건 및 용공 조작 사건들을 양산했고 시민사회단체들을 탄압하고 국민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이유를 들었다.

민주당은 탄핵 역풍으로 원내 과반을 얻었던 열린우리당 시절인 2004년에 국보법을 대폭 바꿀 기회가 있었다. 당시 총선 압승으로 기세를 잡은 노무현 정부와 여당은 국보법 폐지를 포함한 4대 개혁입법을 내걸었다. 세에 밀린 한나라당이 국보법 대폭 손질에 동의했는데, 열린우리당 강경파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폐지를 요구하다가 “국보법 개정안이 물거품”이 됐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국보법 폐지 추진한 민주당 정권
서해 피살 공무원엔 국보법 잣대
북미사일엔 ‘불상의 발사체’ 표현
정황만 놓고 고인의 월북 사실화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국보법에 대한 민주당의 거부감은 18년 전 4대 개혁입법 공방사를 돌이켜볼 정도로 질기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있는 민주당 정부가 국보법의 존재 이유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민주당 의원들이 국보법 폐지법안을 발의하기 불과 9개월 전인 지난해 1월 문재인 정부는 서해 피살 공무원과 관련한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질의에 “월북만으로는 엄밀히 범죄가 아니지만,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월북했다면 처벌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서해에서 피살된 공무원 이대준씨의 월북 혐의는 확정된 바 없다. 고인을 놓고 민주당 의원들은 여전히 월북 혐의를 주장하고 있는데 현재로선 모두 정황에 불과하다. 월북을 위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다면 왜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수복은 안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조류만으론 북으로 올라가기 어렵고 인위적인 힘이 있어야 갈 수 있다는데 고인은 철인이 아니다. 최소한 낮과 밤 하루 이상을 바다 위에 둥둥 떠서 버티면서 북을 향해 30여㎞나 움직일 수 있는 강철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분이었는지 확인된 바 없다.

가족에게도 빚보다 더 무서운 월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데 빚을 피해서 월북을 했다는 추론도 납득하기 쉽지 않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내놓았던 월북 정황은 뒤집으면 ‘월북이 맞는가’라고 반문 가능한 반대 정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정황만으로 범죄자로 낙인찍는 나라가 아니다. 범죄를 확증하려면 범죄 도구 같은 물증이 있어야 하고 재판을 거쳐 혐의가 확정돼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정황만으로 고인의 월북 혐의를 굳히려 했다. 진보 진영이 그간 국보법을 악법으로 비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황과 심증만으로 욱여넣기 수사를 해서 국보법 위반자로 처벌해 사회적으로 매장했다는 게 진보가 주장하는 국보법 폐지 이유 중 하나다.

무엇보다 당사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진실을 확인할 당사자 조사가 불가능하니 월북 논란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확정할 수 없다’는 영역으로 남겨 놓는 게 법치주의와 인권 존중의 상식이다. 범죄 사실이 확실치 않고 당사자 확인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당국과 집권당이 일개 개인을 범죄자로 모는 것은 공권력에 의한 린치다.

민주당은 고인이 북한에서 발견된 이유를 놓고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월북 추정을 거론했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그 선을 넘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다른 민감 이슈를 놓고 보여줬던 모습과 너무나 차이가 난다. 북한 탄도 미사일 발사를 놓고 ‘불상의 발사체’라며 북한의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을 단죄하는 데 극히 신중했던 게 문재인 정부다.

또 피해호소인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중립적 표현을 만들어내 혐의 여부에 대한 판단을 피했던 게 민주당 의원들이다. 미국은 부인하는 사드 전자파에 대해선 ‘몸이 튀겨진다’며 노래를 불렀던 정당이 고인을 놓곤 월북 근거가 ‘미군 정보’에 나온다며 미군 정보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식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감청 정보를 근거로 주장하는데 고인이 사전에 월북을 준비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살기 위해 한 말인지 당사자 조사 없이 단언할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국제사회를 향해 자신들이 질색하던 ‘국보법 위반’을 알렸다. 민주당이 그토록 혐오하는 국보법이 민주당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됐다. 이 얼마나 초현실적인 장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