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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북의 ‘핵 선제 사용 독트린’에 맞설 대책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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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백순 전 주호주 대사

이백순 전 주호주 대사

2017년 북한은 사거리 1만2000㎞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이로써 미국의 서부 도시를 타격할 수 있는 화성-14 미사일 개발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올해 들어 다시 북한은 연이은 미사일 도발을 계속했다. 특히 화성-15, 17 미사일은 워싱턴·뉴욕 등 미국 동부를 사정권에 두고 있음을 보여줬다. 게다가 곧 있을 것으로 보이는 7차 핵실험을 강행하면 북한의 핵무기는 더욱 소형화, 다품종화할 것이다. 핵무기 개발 단계를 보면 북한은 이미 소형화 단계를 지나 다품종화 단계를 거쳐 이제 마지막 단계인 전술 핵무기 배치단계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북한의 핵 선제사용 독트린(강령)이다. 지난 4월 10일 창군 9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의) 근본이익이 침탈될 때 핵을 선제 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김정은 “핵은 공격용” 공개 언급
미국의 핵우산 구체화 작업 필요
‘확장억제 협의회’ 속히 가동해야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약 30년간 핵무기를 집요하게 개발해왔다. 당초 북한은 핵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수단, 즉 협상용처럼 보이도록 포장했다. 그 후 북한은 핵을 미국의 침략위협에 대한 자위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핵 선제 사용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핵무기 용도가 공격용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안보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하게 됐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간 북한의 온갖 위협적 언사를 겪다 보니 북한의 핵 공갈에도 둔감하다. 아직도 “핵은 민족공동 자산”이라거나 “동족에게 사용할 생각이 없다”라는 북한의 선전·선동에 현혹되는 분위기가 퍼져 있어 우려스럽다. 북한의 핵 선제 사용 독트린은 매우 엄중하게 인식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미국의 핵우산을 저지할 수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북한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하거나 전술핵을 사용한 협박을 할 때 한국이 버틸 수 있으려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북한의 ICBM으로 인해 미국 핵우산의 신뢰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미국의 핵우산이 잘 작동하기를 믿고 싶지만, 사실 한·미 간에는 핵우산의 작동방식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미 확장억제 고위급협의회’ 가동을 통해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북한은 ICBM 다량 생산을 통해 2차 타격 능력까지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워싱턴과 뉴욕이 보복 핵 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프랑스는 샤를 드골 대통령 시절 이런 질문에 대한 확신이 없자 독자적인 핵무장의 길로 갔다.

일각에서는 설마 북한이 선제타격을 가하면 한·미의 보복공격으로 궤멸할 것을 알면서 이를 감행하겠느냐는 낙관론도 있다. 반면 김정은이 ‘잔인할 만큼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면 비대칭적 확전의 논리를 채택해 핵을 제한적으로 선제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위기 상황에서 한·미가 선제타격하려 한다면 북한은 이를 막기 위해 핵을 선제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계산할 것이다. 핵 교범에 나오는 ‘쓰거나 지거나(use-it or lose-it)’라는 딜레마를 벗어나는 것이다. 예컨대 남한을 향해 도발한 뒤 미국의 핵우산 작동을 막기 위해 북한은 미국의 전략자산과 증원군이 발진할 괌 기지를 먼저 타격할 것이다.

미국의 보복공격에 직면하면 북한은 미국 동부 대도시를 ICBM으로 공격하겠다는 상호확증파괴(MAD) 협박을 들고나올 것이다. 이 경우 핵 공격에 대한 방어시설을 잘 갖추고 있는 평양시민들이 뉴욕이나 워싱턴 시민보다 훨씬 생존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의 기습 도발 시 미국이 핵우산을 펼쳐준다는 보장이 없다면 북한의 핵 앞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수사적 대응이 아니라 정말 실질적인 대책을 조속히 강구해야 한다. 북한의 핵 선제사용 독트린 앞에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드는 비용과 노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기꺼이 지불해야 한다. 이런 각오로 우리의 갈 길을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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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순 전 주호주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