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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실직했고, 친구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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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지난 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전 총리를 총으로 살해한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41)는 5월까지 교토(京都)에 있는 공장에서 지게차로 짐을 옮기는 일을 했다. 인재 파견회사를 통해 소개받아 1년 반 정도 일했다고 한다. 그 전에도 파견회사 소속으로 회사를 옮겨 다녔다. 총기 구조와 조립법을 배운 해상자위대원 생활도 3년만 근무하도록 규정된 ‘임기제’였다. 전역 후 재무설계사·택지건물거래사 등의 자격증을 땄지만 오래 다닐 만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건설사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가 회사를 이어받았지만 2002년에 파산했다. 현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다 돈이 없이 중퇴한 야마가미는 경제적 불안과 심리적 박탈감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을 찾아내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직장 동료들은 그가 늘 혼자 차 안에서 밥을 먹었고, 동료들과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공범도, 배후도 없는 ‘고독한 늑대형 테러리스트’라고 일본 언론들은 규정했다.

지난 8일 일본 나라현 유세장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 총을 쏜 후 현장에서 체포되는 야마가미 데쓰야. [교도=연합뉴스]

지난 8일 일본 나라현 유세장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 총을 쏜 후 현장에서 체포되는 야마가미 데쓰야. [교도=연합뉴스]

피해자가 일본의 전직 총리라는 사회적 거물임을 제외하면 야마가미와 같은 유형의 범죄자는 새롭지 않다. 지난해 10월 핼러윈데이 밤 도쿄(東京) 지하철 게이오선에서 흉기를 휘두르고 불을 지른 20대 ‘조커남’은 범행 동기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최근 실직했고, 친구가 없다.” 지난해 12월 오사카(大阪)의 병원에 불을 질러 25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방화범은 2010년 실직하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 생활을 했다. 재일 한국인 집단 거주지인 교토 우토로 마을에 불을 낸 22세 방화범도 직장을 잃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불행의 원인을 다른 민족에게서 찾았다.

고독한 늑대형 범죄자는 어디에도 있지만, 유독 일본에서 비슷한 유형의 무차별 살상 범죄가 반복되는 것은 ‘자조(自助) 문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는 게 힘들다, 하지만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다른 이들과 의논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건 부끄럽고 ‘폐를 끼치는’ 일이다. 그렇게 분출될 곳을 찾지 못한 채 안으로만 파고든 분노는 결국 타인에 대한 살의로 급변한다.

아베 전 총리 사망 이후, ‘안전한 일본’이라는 신화가 무너졌다는 진단이 나온다. 유명인 경호 문제, 무기 제조로 이어지는 위험물 거래 등을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훨씬 더 뿌리 깊고 어려워 보인다. ‘가난하고 고독한 늑대’를 키워내고 방치하는 구조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일본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