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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태영이 고발한다

현대카드 11층의 비밀...권위는 집무실 평수서 나오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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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커머셜 대표이사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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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사옥1관 11층 평면도. 상단 맨 왼쪽 방이 정태영 부회장 집무실이고 하단 맨 왼쪽과 상단 맨 오른쪽 각각 2개의 방이 4명의 부문 대표 집무실이다. 사무실 크기가 모두 같아서 인사가 나서 누가 승진한다고 리모델링 할 일이 없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현대카드 사옥1관 11층 평면도. 상단 맨 왼쪽 방이 정태영 부회장 집무실이고 하단 맨 왼쪽과 상단 맨 오른쪽 각각 2개의 방이 4명의 부문 대표 집무실이다. 사무실 크기가 모두 같아서 인사가 나서 누가 승진한다고 리모델링 할 일이 없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기로 한 결정을 계기로 정부와 지자체 고위층이 누려온 공관 제도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과거 권위는 집무실 평수에서 나왔지만 이젠 그런 리더십은 곤란하다"며 공공기관의 공관뿐 아니라 모든 조직이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제안하는 칼럼을 보내왔다. 이어 내일(13일)은 공관 문제를 세금 낭비와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접근한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의 글을 싣는다.

한두 달 전 대기업까진 아니지만 꽤 규모가 큰 기업을 방문했다. 그 회사 대표(CEO)는 만나는 직원마다 반갑게 등을 두들겼다. 소통을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본인 집무실로 사옥 한 층 전체를 혼자 쓰고 있었다. 어쩌다 구내식당에 가서 직원들 등 백번을 두드리면 뭐하나 싶었다. ‘나 혼자 구름 위에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런 조직에서 소통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소통을 중시한다는 또 다른 회사도 비슷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회장 집무실까지 가는 복도가 위압적으로 길었는데, 집무실 앞에서 비서 여러 명을 거쳐야 집무실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저 친분으로 놀러 갔을 뿐이었는데도 절로 움츠러들고 기가 죽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만일 보고하러 간 그 회사 직원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리 오너가 "소통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떠들어도, 직원은커녕 직속 참모인 임원들과의 자유로운 소통조차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일반에 공개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과거엔 집무실 크기로 권위를 세웠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다. 연합뉴스

일반에 공개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과거엔 집무실 크기로 권위를 세웠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다. 연합뉴스

이처럼 리더의 사무실 크기나 회의하는 모습 등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리더십의 제스처’는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훨씬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이 '리더십의 제스처'는 공간에 반영될 수밖에 없기에 결국 공간은 ‘리더가 어떻게 소통하는가’, 다시 말해 '리더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는가'를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다. 민간은 물론 공공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기업·정치 할 것 없이 어느 조직이든 과거보다 다뤄야 할 이슈의 기술성과 복잡성이 훨씬 커지면서 이제 소통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건이 됐다. 그런 만큼 말로만 소통을 외칠 게 아니라 소통을 잘하는 리더십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당장 해야 할 게 바로 공간의 변화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다.

CEO 방 크면 투자받기 어려운 이유 

과거엔 권위가 사무실 평수에서 나왔다. 사실 지금도 그런 데서 권위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간 기업이나 관공서 할 것 없이 수장(首長)의 사무실이 매우 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제스처는 시대에 안 맞는 리더십이다. 만약 어떤 회사 CEO가 혼자 330㎡(100평)짜리 집무실을 차지하는 리더십을 보여준다면, 아마도 대개의 벤처캐피탈(VC)은 투자를 거부할 거다. CEO가 자기 방에 비용과 공간을 많이 쓴 탓에 돈 낭비가 심해져서 투자를 꺼리는 게 아니라, 이런 리더십으로는 회사가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배달의민족 서울 방이동 사옥 8층에서 찍은 CEO 직속 공간. 당시 김봉진 대표도 공용테이블을 사용했다. IT기업들이 사무실 공간부터 바꾸는 건 새로운 리더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혜리 기자

지난 2018년 배달의민족 서울 방이동 사옥 8층에서 찍은 CEO 직속 공간. 당시 김봉진 대표도 공용테이블을 사용했다. IT기업들이 사무실 공간부터 바꾸는 건 새로운 리더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혜리 기자

기업 문화는 리더의 스타일이 큰 영향을 미친다. 소통이 끊어져 리더와 참모의 관계가 경직되면 조직 전반이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결국 조직 전체가 활기를 잃어 위기를 부른다. 실리콘밸리의 빅 테크 기업은 물론, 국내 판교의 IT 기업까지 공간을 고민하고 바꾸는 건 이런 이유다. 살아남으려면 누구든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공공 영역이라고 다를 것 같지 않다. 호화로운 집무실을 포함해 보통 사람들과 분리되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이 건강하고 활기찬 소통을 하며 잘 굴러갈 거라 기대하기 힘들다. 멀쩡한 엘리트 집단도 집단적 최면에 빠져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구성원이 동질적이고 외부와의 물리적 교류가 적을 때 주로 그런 모습을 보인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특히 공공의 공간은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

리더는 조직과 소통하는 공간 만들어야 

방 크기에 따라 부여 되던 ‘구(舊) 권위’ 대신 지금 필요한 권위, 이른바 ‘신(新) 권위’는 홀로 거대한 사무실을 점유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조직과 유기적으로 호흡할 때 나온다. 공간을 바꾼다고 바로 소통이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소통을 막는 허들은 최대한 없애는 방향으로 공간을 만들어가야 신 권위가 세워진다.

이렇게 말하면 내 집무실을 비롯한 현대카드 사옥의 전반적인 레이아웃을 궁금해할 사람들이 많을 거 같다. 이미15년 전부터 현대카드 서울 여의도 사옥은 여러 기업 CEO들이 투어를 요청했고, 또 찾았다. 이젠 국내뿐 아니라 외국 기업 관계자들의 방문 요청도 많이 들어온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기업 문화에 별 관심이 없다면, 우리 사옥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솔직히 사옥 인테리어가 더 폼 나고 좋은 곳은 훨씬 많다.

기업문화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 사옥에서 특별한 점을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 뉴스1

기업문화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 사옥에서 특별한 점을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 뉴스1

우리는 처음부터 방문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과시적으로 꾸미는 데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디테일이 직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할까’에 포커스를 뒀다. 가령, 미국 뉴욕 블룸버그 사옥에선 6층을 통해서만 출퇴근을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음식을 마련해 놔 직원들이 오래 머물며 서로 소통하도록 꾸몄다. 어찌 보면 강제 회식보다 이런 공간 구성이 조직의 사일로(Silo∙장벽)를 막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데 훨씬 큰 도움이 된다.

내가 쓰는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사옥 1관 11층을 예로 들어보자. 이 층엔 중역 방 4개가 나와 대화를 많이 하는 순으로 내 방과 가깝게 배치돼있다. 이외에 나와 중역들이 함께 쓰는 크고 작은 회의실, 주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해당 팀원이 전부 한데 모여 작업하는 일명 '워룸(war room)', 간단하게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키친(kitchen)' 등이 있어 서로 자연스럽게 마주치며 소통한다. 모든 방은 유리(블라인드로 사생활은 보호한다) 벽이라 지나가다 슬쩍 들여다봐서 방 주인이 있으면 꼭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았어도 똑똑 두들기고 들어가 간단한 대화를 한다. 내가 하듯이 내 참모들도 아무 때나 나를 찾아오라는 제스처다. 이렇게 하면 별 거 아닌 일에 정색하고 포멀한 이메일을 쓰는 식의 불필요한 절차가 사라진다.

인사 때마다 임원실 넓히는 조직 미래없다 

임원실을 리모델링하면서 세웠던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내 집무실이 같은 층을 쓰는 다른 중역 방보다 더 크면 안 된다. 둘째, 똑같은 책상과 의자를 쓴다. 만약 좀 더 좋은 것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등 다르게 꾸미고 싶으면, 나를 포함해 누구든 개인 비용으로 처리한다. 셋째, 어쩌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아우르는 대원칙인데, 바로 호환성이다. 20명이 들어가는 대회의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이 똑같이 25㎡(7.5평)다. 만약 다른 많은 기업이 하듯이 ‘상무는 5평’ ‘전무는 7평’ 이런 식으로 승진할 때마다 방 넓히는 공사를 하는 조직은 지금 시대와 맞지 않다고 본다.

현대카드 사옥 11층에 있는 부문 대표 집무실. 유리벽이라 안에 사람이 있으면 약속 없이도 문 두들기고 들어가 간단한 업무 얘기를 나눈다. [사진 현대카드]

현대카드 사옥 11층에 있는 부문 대표 집무실. 유리벽이라 안에 사람이 있으면 약속 없이도 문 두들기고 들어가 간단한 업무 얘기를 나눈다. [사진 현대카드]

우린 인사가 아무리 여러 번 나도 공사 한 번 없이 방 앞에 명함만 바꾸면 된다. 임원 수가 줄면 그 방은 회의실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런 원칙 덕분에 사무실 레이아웃을 수시로 변경하는 게 가능해졌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조직을 유연하게 배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권위는 임원이 보여주는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력과 통찰력 같은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사무실 평수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모든 조직 구성원에게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판교 IT 기업과 스타트업 등이 기업 공간을 바꾸는 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서바이벌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공공의 영역은 과거 모습 그대로이고, 잘 바뀌지 않는 걸까? 무엇보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아마 그렇지 않을 거다. 이대로 가다 보면 서비스 능력이 떨어져 국제 경쟁력 측면에서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적지 않다. 민간보다 늦게 갈 뿐이지 공공의 영역도 결국 공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거라고 본다. 지금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공관 개혁 논의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물론 공간이 바뀐다고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지지는 않는다. 편한 옷 입었다고 운동을 잘하는 건 아니지만 양복을 입고서는 아예 운동을 할 수 없다. 적어도 양복같은 물리적 장애 요소를 없애는 게 모든 개선의 출발점이다.

현대카드 사옥 1관 11층 평연도. 상단 맨 왼쪽 방이 정태영 부회장 집무실이고 하단 맨 왼쪽과 상단 맨 오른쪽 각각 2개의 방이 4명의 부문 대표 집무실이다. 사무실 크기가 모두 같아서 인사가 나서 누가 승진한다고 리모델링 할 일이 없다. [현대카드]

현대카드 사옥 1관 11층 평연도. 상단 맨 왼쪽 방이 정태영 부회장 집무실이고 하단 맨 왼쪽과 상단 맨 오른쪽 각각 2개의 방이 4명의 부문 대표 집무실이다. 사무실 크기가 모두 같아서 인사가 나서 누가 승진한다고 리모델링 할 일이 없다. [현대카드]